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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병역기피자’에게 돌을 던지나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1950년대 한국과 19세기 말 일본에서 병역은 피하고 싶은 부담이었을 뿐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과 대체복무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볼 때 가슴 아플 때가 많다. 몇 년 전의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6%까지 대체복무제를 지지했지만, 젊은 층이 잘 이용하는 포털에서 최근 조사하면 70%까지 반대 의견이 나타난다. 물론 20대의 보수성이 뚜렷해진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병역 문제의 당사자인 젊은 남성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군대에서 보내는 2여 년을 스스로 ‘시간 낭비’라고 간주하는 많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병역거부자들은 병역기피자들과 다르지 않게 인식돼 형평성의 원칙을 깨버리는 이기적 분자로만 여겨진다.

그나마 형평성 있는 유일한 부문?

군 복무 기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내에 양로원에서 똥오줌을 치워주는 등 힘든 사회봉사를 기꺼이 하겠다는 병역거부자들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려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게 정말로 억울하다. 총을 들지 않고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는, 결국 획일화된 병영사회의 소산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입대 예정자와 예비역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수가 월급쟁이나 영세자영업자 가정 출신인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불평등의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출발점부터 유리한 위치에 있는 부유층 자제나 이미 경쟁을 포기한 하류층과 달리, 그들은 살인적이며 불공정한 경쟁에서 이겨,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신분 상승을 도모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병역이란, 형평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 속에서 그나마 형평성이 있다 싶은 유일한 부문으로 느껴진다. 그러기에 그들은 병역거부자들을 ‘신종 병역기피자’로 악선전하는 소리에 쉽게 귀를 기울인다. 정의도 상식도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상대적 약자로서 받는 압박감을, 군사화된 사회가 아직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하는 극소수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배제함으로써 ‘풀고 있는’ 셈이다.

피지배자보다 지배자가 훨씬 더 자주, 더 지능적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병역기피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은근한 부러움이 섞인) 혐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병역기피는 과연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사회악으로만 취급돼야 하는가? 최소한의 민주적 명분을 보유하고 있는 현재의 남한에서는 병역기피자를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는 사람’으로 볼 여지가 있긴 하다. 그런데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져 민중의 눈에 정통성이 없는, 약탈자이자 억압자로만 인식되는 국가에서 병역기피는 무조건 지탄받아야 하는가?

예컨대 병무 행정이 엉망이 되어 돈과 ‘백’이 없는 일부 남성들은 군에 두 번이나 끌려가는 반면 부유층과 권력층은 사실상 병역의무를 지지 않았던, 군 안에서 몇 안 되는 광복군계나 중국국민당군계의 장교들이 점차 주변화돼가는 반면 국가가 아닌 개인 이승만에게 충성심을 보였던 만주군관교 출신의 원용덕(元容德·1908~68)이나 김창룡(金昌龍·1916~56)과 같은 정치군인들이 실세가 됐던 1950년대 초반, 국군에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민중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23만 명이 도망 다니다

오늘날 병역기피는 다소 ‘귀족적’인 현상이지만 1950년대의 병역기피는 대중적이었다. 특히 1950∼53년 전란기에 동족상잔의 전선에 끌려가 의미 없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 상당수 민중은, 경찰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곤 했다. 공식적 통계로 봐도 1953년의 경우 소집 통지서를 받은 징병 대상자 중 23만 명이 ‘무고 불참’, 즉 도망을 다니는 등 소집 대상자 중 63%만이 실제로 소집됐다. 1950년대 내내 전체 징집 대상자의 15∼20% 수준이던 병역기피자 비율이 1958년 26%나 되었다. 군은 많은 민초들에게 피하고 싶은 ‘부담’일 뿐이었다. 민중들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는 국가는, 그들에게 ‘국민’으로서 의무 다하기를 요구할 수 있는가?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모범을 대한민국에 보여준 메이지 일본에서는, 정부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서 병역기피는 가장 보편적이었다. 근대 초기 일본 징병제의 가시적 불평등성은 민중의 반발을 사게 돼 있었다. 1873년의 징병령은, 말로는 ‘국민의 군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관료와 국립전문학교 학생, 유학생, 의과학교 학생, 그리고 270엔을 상납해 병역을 대신 이행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재력의 소유자 등 상류층과 중산층, 납세의 책임을 졌던 각 가구의 호주와 독자독손, 양자들까지 전부 면제되고, 가난한 농민의 2남이나 3남만이 병역 의무를 짊어지게 했다. 당연히 병역 의무는 그 대상자들에게 봉건적 부역으로만 인식돼 대대적인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1870∼80년대 병역기피 방법은 다양했다. 돈이 아주 없는 이들은 징병검사 기간에 품 팔러 돌아다닌다는 핑계로 고향을 떠나 검사가 끝나오면 돌아왔고, 해안 마을에서는 검사 기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마침 어로활동에 나선다 하여 바다로 떠나곤 했다. 석탄광산에 들어가 광부가 되어 초기 광촌(鑛村)의 익명성을 이용해 경찰망을 피하는 이들도 수천 명 단위로 추산됐다. 사고로 언제 죽을지 모르고 신변의 자유를 일부분 박탈당하는 당시 광부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군대를 어떻게 해서라도 빠지려는 평민의 마음가짐이 어느 정도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가난뱅이들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도망다녔는가 하면, 돈이 약간이라도 있었던 서민들은 위장 분가(分家)를 단행해 호적상으로 호주가 되거나, 돈을 주어 남의 집에 형식상의 양자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병역을 피했다. 병역법이 19세기 말까지 시행되지 않았던 오키나와로 위장 전적하기까지 했다. 1870∼80년대 내내 병역기피자 수는 증가했다. 공식 통계에서 ‘도망자’로 분류되는 이들의 비율만도 1881년 전체 징병 적령 인구의 약 3%에서 1889년 9.9%에 달했다. 해마다 의병(依病), 의가사(依家事) 면제를 받았던 수만 명의 징집 대상자 중에도 사실상의 기피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1889년의 징병법 개정 이후로 다수의 면제 조항들이 삭제되어 면제받기가 어려워졌지만, 병역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계속됐다.

국가와 군대가 기피하게 만드는데…

군 복무에 대한 저항이 국가와 군대의 반민중적·억압적 성격에 기인하는 현상이므로, 그 역사적 배경의 고려 없이 비난만 하기 어렵다. 지금 비록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월급을 주지 않고 1인실이나 2인실에서의 숙박 등 인간다운 생활 조건을 제공하지 못하는, 폭력, 폭언, 성추행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군대는 결국 많은 이들에게 기피를 하려는 마음을 스스로 심어주는 것이다. 군에서의 인권적 상황이 더 본격적으로 개선되고 군에 신념이나 성격상의 이유로 도저히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가 마련돼야 군 복무를 기피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의 수가 확 줄어들지 않을까?

참고 문헌

1. 후지와라 아키라(藤原 彰) 지음, 엄수현 옮김, 시사일본어사, 1987, 41∼67쪽

2. 박영준, 국방군사연구소, 1997, 228∼237쪽

3. 병무청 엮음, 1985, 상권, 505∼527쪽

4. 유이 마사오미(由井正臣),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지음, 東京: 岩波書店, 1989, 65∼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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