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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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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아성’ 교수집단의 탄생

등록 2007-05-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제-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수치를 모르는 지성인이 만들어지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지난 3월7일, 울산과학대학교에서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노조를 만들어 65만원 정도의 임금을 70만원으로 올려달라는 여성 하청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의 요구를 해당 하청업체가 처음엔 받아들였지만, 결국 40~60대의 미화원들이 ‘부당하다’고 충분히 간주될 수 있는 해고를 당해 생계가 막막해졌다. 8명이 농성에 돌입하자 학교는 정규직 직원들을 투입시켜 옷을 벗어 “알몸 저항”을 하고 있었던 아주머니들을 힘으로 끌고 나오도록 했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머리카락이 뜯기고 맨발에 유리가 박혀 끌려나오는 아주머니들의 사진이 인터넷에 나오자 노동계에서는 반발하고 나섰다.

울산과학대학 사태는 민주노총 탓?

그런데 정작 가장 반발했어야 했을 두 집단, 즉 울산과학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그 분노의 화살을 하청업체나 학교 당국이 아닌, 아주머니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상급 노동단체인 민주노총에 돌렸다. 교수들이 민주노총의 ‘개입’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내고, 일부 학생 ‘대표’들은 농성 노동자들에게 “물리력 동원”까지 언급했다고 한다. 젊은 지성인인 학생 중에서도, 기성의 지성인인 교수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 탄압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그룹 취직에 눈이 멀어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들을 “수업 분위기를 해치는 방해 요소”쯤으로 여기는 학생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들에게 개인의 독립성이나 양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울산과학대학의 교수집단에 이 사태의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아가서는 ‘교수’라는 전국적인 직업집단의 책임도 아울러 물어야 하지 않는가? 만일 교수 사회에서 자본에 대한 굴종과 노동자에 대한 가해 행위가 지식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처신으로 여겨졌다면 과연 울산과학대학의 교수들이 소외된 소수 노동자의 생계를 박탈하는 울산과학대학의 이사장 정몽준의 편에 지금처럼 용감하게(?) 서 있겠는가?

문제는, 5년 전에 정몽준이 연출한 자본의 큰 잔치인 월드컵에 “민족의 경사” “역사적인 이벤트”라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맨발에 유리조각이 박힌 여성 노동자의 신음소리에 나 몰라라 하는 것도 한국 교수 사이에서는 ‘수치’로 여겨지지 않는 데 있다. 물론 모든 교수들이 국가·자본과 유착됐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교협 등의 조직으로 대표되는 소수의 진보적인 교수도 있으며, 이라크 파병 등 특별하게 악명이 높은 정권의 실책에 대해서 상당수 교수들이 비판적 태도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노동자’로 인정하여 지금 합법화를 위한 투쟁을 열성적으로 전개하는 교수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약 1100명, 즉 전국 전임 이상 교수의 2% 수준이다. 반대로 보수 언론에 칼럼을 써서 여론의 보수화·극우화를 주도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현직 교수들이다. 이념은 진보라 해도 학생이나 조교, 시간강사와의 관계에서는 무엇보다 ‘권위’와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교수들이 다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지적 수준으로 봐서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해서라도 얼마든지 진보의 편에 설 만도 하는 직업집단이, 이처럼 ‘보수의 아성’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동아시아권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근대적 대학 제도를 도입했을 때에는, 교수들을 어용적 사회 지도자로 만드는 것이 정부의 바라는 바 중 하나였다. 초기의 일본 대학교에서는 교수 수가 엄격히 제한돼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대우는 고급 공무원 수준이었다. 예컨대 1877년에 설립된 도쿄제국대학에서는 1890년에 이르러 전임교수의 수가 158명밖에 안 됐는데, 그 한 달 월급이 80엔에서 250엔 수준이었다. 참고로 하루에 16시간까지 일했던 그 시대의 방직공장 여공은 한 달에 많이 벌어봐야 5∼6엔 이상이 안 됐다. 최고 재벌 집안의 딸들을 며느리로 쉽게 데려올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일본 제국대학의 교수들은, 주요 현안에 대해 정부보다 오히려 더 강경할 때가 많았다. 러일전쟁 당시 도쿄대학의 일군의 유명 교수인 ‘7박사’가 “바이칼 호수까지의 시베리아 땅을 정복하기 전까지 강화하지 말자”는 초강경의 입장을 내세워,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던 정부를 곤욕에 빠뜨린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독재정권 대민 통제에 ‘공로’한 교수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일본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로 명문대학에는 ‘반체제’ 교수들도 있었다. 도쿄대학 경제학과에서 숱한 탄압을 받았다가 전쟁 때에 교수 자리를 빼앗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태두 오우치 헤요(大肉兵衛, 1888∼1980)나 기독교적 평화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는, 진리를 위해서 ‘학계 귀족’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내던질 수 있었던 대표적 ‘양심파’였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반전 활동으로 해임된 교수들은 많아야 10∼20명 이상 되지 않았으며 대다수는 적어도 공석에서 “백인에게서 아시아의 해방” 등을 주장해 ‘성전’의 분위기를 지적으로 지도했다. 그들을 양성한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진심으로 보답한’ 셈이다.

한국인들을 교수로 채용하지 않았던 경성제국대학 이외에는 종합대학이 없었던 일제 시절이 끝나자마자 국내에서 우후죽순으로 대학교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여론주도층으로서 대학교수층이 만들어졌다. 건국 전후, 6·25 전쟁의 와중에서 좌파 지식인들이 교단을 대거 떠나거나 침묵을 강요받았지만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학교수 집단이 정권과 본격적으로 유착하지 않았으며, 많은 측면에서 자유당 독재에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거리 두기’ 위주의 관계는, 학술 엘리트를 ‘하위 파트너’로 삼아 그 두뇌와 권위를 이용하려던 군부 엘리트의 등장으로 일변됐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정치군인들이 처음에는 유명한 대학교수들을 반강제로 동원해 국가기획위원회나 중앙정보부의 정책연구실에서 법률기안·계획입안에 이용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평가교수단’의 참여 등으로 유혹해 자발적인 협력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1965∼81년 평가교수단에 참여하면서 ‘새마을운동’이나 ‘국적이 있는 교육’ 등 독재정권의 대민 통제 프로젝트의 추진에 ‘공로’를 세운 교수 수가 200여 명으로, 그 당시 학술 엘리트들을 거의 총망라한다. 비판자들을 손쉽게 해고하는 데 늘 악용될 수 있는 교수재임용제도라는 ‘채찍’이 1976년부터 도입돼 교수들을 긴장시켰지만, 또 반대로 유신정권 시절에 교수의 봉급은 대폭 오르기도 했다. 순응주의적인 오늘날의 교수 집단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본의 교수·학생 순치, 실마리가 안 보인다

‘체제파 교수’ ‘어용교수’의 망령은 과연 한국 대학을 떠날 것인가? 요즘 같으면 정치권과의 유착보다는, 특히 울산과학대학처럼 자본에 의해서 운영되며 자본의 혜택을 받는 대학에서의 ‘자본에 의한 교수·학생의 순치’는 더 큰 문제로 나타나는 듯하다. 보수화되면서 자본을 견제할 능력을 잃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그야말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참고 문헌

1. 이상우, 제1권, 중원문화사, 1984, 197∼235쪽.
2. 한준상, 한국학술정보, 2005, 257∼377쪽.
3. 유마코시 도오루(馬越 徹) 지음, 한용진 옮김, 교육과학사, 2001.
4. “Universities and Students in Wartime Japan”(〈Journal of Asian Studies〉, Vol. 45, No. 4), Ben-Ami Shillony, 1986, pp. 769∼787.
5. “Professors and Politics: The Meiji Academic Elite”(〈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 3, No. 1), Byron K. Marshall, 1977, pp. 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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