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테러를 막다가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무고하게 죽은 일본인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남북한 관련 기사들을 꼼꼼히 찾아야 하는 직업상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을 두루 보지만 가끔 거의 억지로 볼 때가 있다.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을 ‘반군’(insurgents)이라고 지칭하는 글들을 보는 것이 역겹기 때문이다. 의병이나 독립군 유격대들을 ‘폭도’라고 지칭했던 일제 어용지들과, 저 미국의 일간지들이 무엇이 다른가? ‘합방’ 전후의 조선과 오늘날의 이라크의 차이라면, 전자는 무기와 병사들이 태부족해서 무장 독립운동으로 외적을 내몰 힘이 없어 국민국가를 끝내 만들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데 반해 후자는 후세인 시절 정규군의 장비와 인력을 물려받아 침략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힐 힘을 가진 것이다. 물론 절대적 도덕 차원에서는 어떤 폭력도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적어도 국제법 차원에서 따져본다면 유엔 헌장(제2조 4항)을 위반하는, ‘침략’이라는 국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군인이나 현지 부역자들에 대한 저항세력의 공격은 ‘반군의 테러’라기보다는 방어권의 행사일 뿐이다.
‘나라를 위한 일’에 평민 하나쯤이야?
그런데 침략군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공격이 정당방어라 해도, 이것이 과연 문제없는 방어 수단인가? 지금 이라크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공격들의 효과가 세계 초강대국의 침략·식민화 계획을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클 수 있지만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미군을 표적으로 하는 많은 공격에서, 그저 그 자리에 우연히 있던 이라크 양민들이 무고하게 죽고 다친다. 아무리 ‘약자의 저항’이라 해도, 폭력이란 과연 늘 완벽하게 의도대로 실행될 수 있는가? ‘정당한 폭력의 무고한 희생자’ 문제에, 한국 독립운동도 일찍 부딪치게 됐다.
1909년 12월22일, 젊은 기독교인 이재명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회에 참석했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제1호 매국노 이완용에게 ‘정의의 칼’을 겨누었다. 이완용이 중상을 입었음에도 살아남게 된 이유는, 이재명의 길을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았기 때문이다. ‘매국’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평민 박원문이 이재명의 다급한 칼에 찔려 죽었고, 이완용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완용에 대한 이재명의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매국노를 인력거에 태워준 죄(?) 이외에 별다른 죄를 저지른 일이 없던 박원문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정의인가? 일제는 일제대로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이완용의 암살미수건만으로 사형을 받을 수 없던 이재명에게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다.
이재명이 공판에서 박원문을 죽인 것이 ‘우연’이었음을 강조하고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무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목숨을 잃는 것은 당시에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별다른 고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이재명 의거’에 대한 기억에서 박원문의 죽음을 꼭 빠뜨려야만 하는가?
외적의 괴수 곁에 우연히 섰다가 민족 투사의 의탄(義彈)에 맞아 무고하게 쓰러지는 ‘의도되지 않은 희생’의 문제는, 그 뒤에도 한국 독립운동에 어두운 그늘을 계속 드리웠다. 예를 들면 아나키즘 경향의 ‘직접 행동’ 단체인 의열단이 1922년 3월28일 상하이 부둣가에서 일제의 해외 침략정책의 입안자였던 다나카 기이치(1864~1929) 남작에게 총탄과 폭탄 세례를 준비했는데, 여의치 않게 다나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채 총소리에 놀라 다나카를 껴안은 브라질 출신의 미국 여성 스니더 부인을 오살하고 몇 명의 미국인, 영국인, 중국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다가 아무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스니더 부인의 참사는 상하이의 외국 조계를 경악게 해 한국 독립운동 전체에 대한 탄압 강화로 이어졌다.
김구 부하가 ‘정당하게’ 살해한 김립
그런데 중국을 무대로 한 무장 독립투쟁에서 중국인이나 외국인이 우연히 희생됐을 때 여론 악화가 뒤따르곤 했지만, 한국 쪽에서도 중국 쪽에서도 특히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 민간인의 피해에 별다른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예컨대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때 일본인 사진기자를 비롯한 수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침략 원흉들의 폭살과 부상에 기뻐하고 있던 중국 여론은 이를 인식하지 않았다. 테러로 피해를 입어도 피침 지역의 현지인들에게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침략적 야심을 견제할 줄 모르는 ‘말 잘 듣는’ 침략국 민중이 받는 집단적 업보라 할까? 미 제국의 ‘공범’이 되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자국의 시민이 현지 저항세력의 손에 죽은 것을 이미 본 바 있는 한국 국민으로서도 심각하게 성찰해볼 만한 대목이다.
‘무고한 희생자’의 문제와 함께 저항 방법으로서의 테러를 의심케 하는 부분은, 폭력이 일상화되면 저항 주체 사이의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도 전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적과의 싸움의 역사’로 보지만 실제로는 독립투쟁에서도 내부적인 권력 쟁투 양상이 적지 않았으며 때로는 폭력적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동류를 향한 폭력의 주체가 저명한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과연 그 폭력이 무조건 선한 것이던가?
예를 들어,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이다.
저항 집단이 만들 독립국가의 모습은
70여 년 전, 한국 공산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박헌영은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면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의 폭력에 의한 운동이 필히 패배한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의 이라크 상황을 본다면 윤봉길과 비슷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있는 무장 투쟁이 성공할 확률도 적지 않지만, 과연 소수의 저항 집단이 만드는 독립국가는 민중적, 민주적, 인권적 모습을 띨 것인가? 최고의 빨치산 대장이 결국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한 한반도 현대사의 교훈을 염두에 둔 필자는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의 성공적 투쟁에 대해 기쁨과 함께 일정한 염려를 느끼고 있다.
참고 문헌
1.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반병률, 제32집, 63~103쪽, 2005.
2. ‘1920년대 전반기 의열단의 민족 운동과 노선 추이’ 김영범, 제34권, 97~177쪽, 1992.
3. ‘의사 이재명의 삶과 죽음’ 김삼웅, 제11호, 419~436쪽, 2003.
4. 윤덕한, 중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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