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부동산 소유자 등 이중적 존재, 개발의 아주 작은 열매에 열광해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오슬로대학에서 ‘한국 사회·정치’ 수업을 할 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는 극우적 색채가 강한 보수의 대표자 이명박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근대적 노동계급이 다 형성된데다 비정규직화와 같은 최근의 사회 재편으로 근로 인구의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됐을 터인데, 어떻게 해서 ‘부자들의 대표’가 계속 50% 안팎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은 필자에게 배우는 노르웨이 학생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산업화된 나라들 중에서는 미국 다음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과연 가장 보수적인 곳이 아닌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박정희를 떠올리게 하는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의 이미지, 박정희를 계승한 개발주의적 발상들은 이명박 대선후보의 주된 상징적·이념적 자산이다. 그가 선거에서 성공할 확률은 높지만, 그의 개발주의적 처방으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생 문제들을 어차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사진/ 연합 손대성)
독자적인 대중적 좌파 정당이 발달되지 못한 미국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 중심부 내지 준중심부 국가 중에서는 일본과 한국만큼 사회주의적 진보세력이 약하고 극우가 강한 데가 없다는 게 이 질문의 요지다. 일본에서는 지난 7월 총선에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함께 약 12%의 표를 얻었으며, 한국에서는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3%의 표를 얻었지만, 유럽에서는 좌파가 20∼30% 미만의 표를 얻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다 이명박이나 고이즈미 준이치로처럼 고정적으로 일부 노동자 사이에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극우 정치인을 찾기가 힘들다. 왜 하필이면 한국과 일본이 지구의 정치학적 지도에서 온건 좌파 지향의 유럽, 급속히 급진화돼가는 중·남미와 대조가 되는 상대적 ‘친미 보수 권역’을 이루게 됐는가?
노르웨이 5% 대 한국 34%
학계에서 자주 지적되는 한·일의 상대적 보수성의 원인 중 하나는, 자영업자 인구가 비교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북유럽 도시 풍경과 한국 도시 풍경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한국의 무수한 식당과 가게, 상가 건물들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정반대다.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필자 입장이 난감해지는 이유는, 오슬로대학을 벗어나서 적어도 20분 정도 걸어야 비로소 괜찮은 식당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소규모 가게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소매업 시장의 99.3%를 네 개의 큰 독점 기업(체인점)이 독차지하는 노르웨이에서는 ‘가게를 내서 장사에 성공했다’는 유의 이야기는 이미 ‘머나먼 과거의 동화’ 취급을 받는다. 전체 비농업 부문 피고용자에 대비해 비농업 자영업자가 5%도 안 되는 노르웨이에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안정된 소득의 임금 근로자들이 맹목적 ‘성장’보다 차라리 재분배 위주의 정책에 더 쉽게 합의한다.
반면에 무급 가족까지 포함해서 자영업자들이 전체 취업자의 34%를 이루는 한국이나 16%를 이루는 일본에서는, 당장의 자금 흐름이 문제가 돼 ‘경기 회복’을 약속하는 극우파의 감언이설에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면서도 착취 대상이란 자신과 가족, 몇 명의 아르바이트생 빼고 별로 없는 중간 규모 이하의 자영업자들은 대체로 사회·경제적으로 이중적 존재들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진정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자신들과 몇 명의 주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기 변동에 따라 늘 도산 위기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들이 ‘변화가 없는 호경기’를 찾다 보니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주된 지지 기반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유럽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운하 건설’을 위해 예산을 대대적으로 풀어 경기 부양을 도모한다고 해도, 적자를 보거나 월 평균 100만원 이하의 소득밖에 못 올리는 285만 명의 영세 자영업자(전체 자영업 인구의 약 37%)들의 사정이 과연 획기적으로 나아질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장 내일 도산해 생계 기반을 잃을지도 모르면서 사는 이들로서는-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의 많은 영세업자들처럼- 차라리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좌파를 지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대 체인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가게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이르는 지방 영세상인보다는 서울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민주노동당의 주된 지지 기반은 조직화된 숙련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지만, 일본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의 지지까지도 부진해 거의 고학력자들의 표에 많이 의존한다. 늘 민중을 부르짖고 민중에 호소하는 좌파가, 민중의 많은 계층으로부터 고립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사회심리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다.
극단적 소극성 속에서도 ‘적하’된 것들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적 산업자본주의는, 영국에서는 거의 150∼160년 동안, 독일에서는 약 130∼140년 동안 발전돼왔지만 일본에서는 그 연륜이 90년에 불과하고 한국에서는 아예 30년밖에 안 된다. 후발 주자인 한·일에서 국가와 재벌 주도로 중화학공업 건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노동자들과 중간계층 소득 사이에 학력과 부동산 보유에 따르는 격차가 벌어지기도 하고 도·농 격차, 재벌과 중소기업 고용자 사이의 격차 등 온갖 불균형과 불평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배자들이 불가불 성장의 일부 과실들을 ‘밑’으로 전달시켜야만 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이는 노조들을 순치하고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이었으며, 한국에서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상황에서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 정권이 민생 문제 해결의 시늉이라도 보여주어야 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1959년부터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하고, 1961년에 농민과 자영업자까지 가입할 수 있는 국민연금을 완비하고, 1970∼80년대 정부의 총지출에서 복지 지출 비율을 거의 3배(1970년대 초반의 6%부터 1989년의 18%까지) 올리는 등 유럽식 사민주의자 없이도 복지사회의 기본은 마련됐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일선 노동자에게 장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연공서열식의 임금 인상 제도와 ‘능력에 따르는 승진’을 모토로 내세운 고과제도, 그리고 약 150만 고용자 가구가 살고 있는 저렴한 임대료의 사택(社宅) 제도를 만드는 등 우파 조합주의적 ‘노사 협력’의 분위기를 부추겼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일본의 복지제도가 유럽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가족과 같은 기업’은 어디까지나 개별 노동자의 무력함과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을 호도하는 허위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의 빈곤과 불안의 악몽을 보수주의자들의 집권 밑에서 벗어난 경험을 가진 일본 민중의 상당 부분이 자민당 정객들을 ‘시혜자’로 인식하는 것은 현실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박정희가 일본을 모델로 삼으면서도 최저임금 제도 도입을 끝내 하지 않는 등 복지 부문에서 일본과 대조되는 극단적 소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도 반독재운동의 대중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주도한 초고속 축적의 일부 과실이라도 ‘밑’으로 적하(滴下)해야 했다. 예컨대 1971∼84년 새마을운동에 정부가 투입한 예산은 약 4조원에 이르는 등 당시 경제 인구의 약 45%를 이루는 농민층에 대한 민심 무마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농 간의 소득 격차가 심했지만 정부가 쌀 수매가를 꾸준히 매년 10% 이상 올리고, 경제성장의 결과로 비농업 부문 일자리가 많이 생기는 상황에서 농촌에서 영세농가의 비율이 감소돼 ‘중농화’ 경향까지 나타났다. 물론 노동자의 실질임금 연례 증가의 폭(8%)은 중산계급 소득 증가율에 비해 부족했지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평균 한 달 식료품 비용을 넘어 공장에 다니는 사람에게 드디어 배불리 먹는 삶이라도 가능해진 것은 역시 초고속 개발 시절인 1970년이었다.
자기 땅 한 뼘이라도 갖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조롱하듯이 1960∼70년대 내내(1972년과 1973년만 제외하고)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25∼50% 정도를 기록해 부동산 보유자들이 안정된 불로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의 통계에 의하면 부동산 보유자의 총수는 1100만 명 정도 됐다. 전 국민의 4분의 1은 건설 부문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된 토건 경제의 수혜자가 됐으며, 수혜자 반열에 끼지 못하는 상당수 노동자와 영세민들이 죽기 전에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보기 위해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게 된 것이다. 가난뱅이들이 박정희가 설계한 사회 모델을 혐오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는 그들은 박정희 대신에 ‘능력이 없어서 남처럼 잘살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하기만 했다.
문제는 대권 쟁취 그 다음
‘부자의 후보’ 이명박은 수많은 가난뱅이들의 표를 동원할 만한 상징적 자원, 즉 ‘박정희를 떠올리는 1970년대 자수성가형 경영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단순히 기아를 면한 것부터 지가 상승으로 떼돈을 벌어 대학 교육·취직 기회 확충으로 출세에 성공한 것까지 ‘수혜’ 정도가 다양하지만, 다수의 한국인들은 1970년대에 빚졌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물질적 삶의 개선이 기반이 되어, 수많은 이들이 거기에다가 애국주의부터 ‘실패자는 무능력자다’ 등의 성공주의 이데올로기까지 박정희 시절의 온갖 국가주의적·자본주의적 관념에 그대로 포섭되고 말았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종교, 지역, 계급, 고용형태별로 분열돼 고질화된 갈등 속에 고착돼 있는 한국 사회에 ‘1970년대의 신화’는 거의 유일한 통합 기제로 작동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명박이 대권 쟁취에 성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1970년대는 초고속 개발과 함께 극심한 불평등을 낳았으며, 4∼5% 이상의 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진 오늘날에 이 불평등은 계속 악화일로로 심화됐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든 여권이 기적적으로 정권 유지를 이루어내든 앞으로 5∼10년 안에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계급 갈등들이 폭발의 지점까지 확실히 갈 것이다. 그때에 가서 좌파 세력들이 노동계급과 영세민의 투쟁을 이끌어 이 사회에 믿을 만한 평등·복지적 대안을 제시해 국민적 신뢰를 받아야 우리가 비로소 죽은 독재자의 망령에서 벗어나 ‘세계에서 미국, 일본과 함께 가장 보수적 사회’의 불명예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을 이번호로 끝냅니다. 이어서 ‘박노자의 고대사 탐험’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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