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모래판은 더없이 뜨거웠다. 1986년 6월 천하장사 결정전. 이전까지 이만기(53·당시 현대중공업)가 ‘절대 강자’였다. 역대 일곱 번의 천하장사 대회에서 5차례 왕좌를 차지하며 씨름판을 사실상 천하통일했다. “씨름 기술 1만 개를 가져서 ‘만기’(萬技)”라고도 불렸다. 그의 상대는 럭키금성(현 LG) 소속 이봉걸(59)이었다. 그의 별명은 ‘인간 기중기’. 키가 205cm나 됐지만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천하장사 문턱을 한 번도 넘지 못해 만년 2인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날 ‘인간 기중기’는 네 번째 판에서 ‘황태자’를 하늘까지 추켜올린 뒤 모래 바닥에 메다꽂았다. 전매특허인 ‘잡치기’를 필살기로 구사한 뒤, 그는 포효했다. 이봉걸이 경기 전적 3승1패로 첫 천하장사에 오른 순간이다. 대구체육관을 가득 메운 5천여 관중은 ‘약자’의 반전 드라마에 환호했다.
일곱 식구 먹여살린 이봉걸의 ‘잡치기’이봉걸은 첫 천하장사 상금으로 1500만원을 받았다. 당시 국내 프로야구 최고 투수 최동원이 4천만원대 연봉을 받던 시절이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고기를 잘 못 먹는) 시래깃국 체질이 됐다”던 이봉걸은 부모와 형제 등 ‘딸린 일곱 식구’를 제대로 건사하게 됐다.
3개월 뒤, 추석을 앞둔 천하장사 결정전에선 이만기가 왕좌를 다시 뒤엎었다. 결승에서 이만기는 특유의 화려한 손놀림으로 이봉걸의 온몸을 현란하게 휘감아 돌렸다. 그는 매 판마다 치명적인 안다리감아돌리기, 잡치기, 앞무릎치기를 구사해 경기 전적 3-0으로 이봉걸을 완파했다. 1983년 프로씨름이 출범한 지 3년 만에 벌어진 이들의 극적인 ‘왕위 쟁탈전’은 프로씨름 전성기의 서막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이만기와 이봉걸의 역대급 씨름 맞대결이 벌어졌던 그해, 황규연(41) 현대삼호중공업 코끼리씨름단(현대삼호) 감독은 서울 독산초등학교에서 씨름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프로씨름 태동기인 그 시절에 샅바를 매기 시작해 30년간 씨름판에서만 살았다.
역대 최고액 신인, 천하장사 두 차례, 백두장사 여섯 차례 등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러나 프로씨름이 각종 부침을 겪으면서 씨름의 부흥기-전성기-침체기-몰락기를 모두 경험했다. 지도자가 되고 3년 만인 지난 9월17일엔, 마지막 남은 프로씨름단이자 그가 지휘봉을 잡은 현대삼호가 공식 팀 해체를 선언했다.
9월2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자신을 ‘이만기 키즈’라고 부르는 데 스스럼없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1980년대 중반 씨름의 인기가 지금의 야구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몸이 허약해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박세리 이후 부모들이 자식 골프 가르치듯 그때는 체격 좋은 아이들을 너도나도 씨름을 시켰다.”
갓 씨름을 시작할 때만 해도 별명이 ‘멸치’였다. 프로선수 시절 한쪽 허벅지 둘레가 31인치(79cm)에 이르렀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키만 멀쭉이 컸지 씨름에 걸맞은 ‘몸매’도 ‘몸세’도 찾기 어려웠다. 그는 “그래도 씨름이 좋았다. 힘으로 맞부딪치되, 힘만으로 이길 수 없는 씨름의 묘미를 몸으로 익혔다”며 “게다가 씨름선수들은 인기도 최고였다”고 했다.
숱한 스캔들 이만기, 신인 최고 연봉 황규연실제 당시 이만기·이봉걸·이준희 등 이른바 ‘씨름 1세대’의 인기는 상상을 넘었다. 그해 첫 프로대회를 앞두고 선수 계약 과정에서 이만기는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억3500만원을 받았다. 이준희를 비롯해 황영호·장지영 등은 7천만~9천만원에 이르는 거액으로 계약했다. 국내 최고 스포츠 스타였던 이만기는 당시 ‘연상의 여배우’ 김아무개, 가수 이아무개, 김아무개, 양아무개 등과 끊임없이 스캔들에 얽혔다. 언론에서 ‘이만기가 염문설에 지쳐 내년에 장가간다’는 기사를 낼 정도였다.
국내와 일본을 오가며 최고 가수 반열에 올랐던 김연자가 5집 앨범에 란 노래를 수록했다. 주요 씨름 경기마다 ‘배지기 들어간다, 호미걸이 받아라/ 청룡만세 백호만세 천하장사 만만세~’라는 가사가 들어간 이 노래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황 감독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기량을 쌓는 동안에도 프로씨름은 빛나는 시절을 이어갔다. 1989년엔 ‘슈퍼루키’ 강호동이 모래판에 등장해 이만기를 꺾었다. 코치로 전업한 이준희가 강호동을 앞세워 ‘2대’에 걸쳐 이만기와 모래판 전쟁을 벌였다. 이봉걸은 ‘애송이’ 강호동의 돌풍을 잠재우는 ‘천적’ 관계를 만들었다. 그해 추석장사씨름을 앞둔 기사를 보면 ‘타고난 씨름꾼’ 이만기와 ‘삭발 투혼’ 이봉걸, ‘겁 없는 10대’ 강호동이 삼파전을 벌였다.
황규연은 1996년 세경진흥씨름단 선수로 프로에 데뷔했다. 당시만 해도 씨름은 ‘명절 최고 스포츠’로서 인기를 유지했다.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프로씨름단이 8개나 됐다. 그가 계약금과 연봉을 더해 신인 역대 최고액인 3억5천만원을 받을 만큼 대접도 좋았다.
“그때는 씨름이 진짜 프로였다. 해마다 신인 선수들이 들어왔고, 씨름단과 협회가 이들에게 팬들을 상대하는 예절과 옷입기를 가르쳤다.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언론을 대할 때 말하는 법까지 훈련했다.”
‘몸본’이란 것도 있었다. “경기에 앞서 주요 선수들이 ‘씨름판의 모래터를 정갈히 다지는 동작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 민족과 나라를 수호한다’는 뜻을 담은 의식이었다. 하나같이 씨름의 가치를 세우고, 선수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들이었다.”
황 감독은 “그때의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지금도 야구나 축구 못지않은 스타 선수들이 즐비할 것이다.1990대 초반에는 가장 인기 높은 스포츠였다. 신체적으로 뛰어나고 스타성 있는 어린 선수들이 야구 못지않게 씨름으로 쏠렸을 것”이라고도 했다.
17개 실업팀은 남아 있지만그러나 인기는 순식간에 몰락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씨름단 모기업에 치명적인 경영난을 안겼다. 기업들은 가장 먼저 스포츠단에 손댔다. 특히 인기가 예전만 못하던 씨름단이 줄줄이 주저앉았다. 200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경제난이 조금씩 풀렸지만 씨름 쪽 상황은 더 나빠졌다. 기업들은 “전통 씨름의 ‘구식 이미지’가 세계화와 맞지 않는다”며 씨름단 창단에 손사래를 쳤다. 대신 야구·축구 같은 서구 스포츠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씨름협회 내부의 분열과 분쟁이 겹치면서 2004년 프로씨름단이 3개까지 줄었다. 2년 뒤에는 LG투자증권씨름단 등 2개 씨름단이 또 떨어져나갔다. 황 감독과 동갑인 ‘황태자’ 이태현을 비롯해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등이 이종격투기 링으로 떠났다. ‘소년장사’ 백승일은 트로트 가수로 변신했다. 2009년 ‘마지막 씨름 황금 세대’로 불리던 황 감독이 천하장사에 오르는 투혼을 펼쳤지만 대중의 관심을 되찾아오지 못했다.
최근 10년간 현대삼호만이 유일한 프로씨름단으로 ‘홀로서기’를 해왔다. 그러나 9월 결국 프로씨름은 명맥이 끊겼다. 현대삼호 코끼리씨름단이 해체를 선언했다. 현대삼호 쪽은 “모기업인 조선산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씨름단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올해 말까지 씨름단을 운영하지만, 내년부터 새로 창단되는 전남 영암군청팀에 팀 전체를 넘길 것이다”고 밝혔다.
황 감독은 “1983년 프로씨름 출범과 함께 30년 넘게 유지된 ‘현대가 씨름단’이 사라지게 됐다. 씨름인과 씨름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며 안타까워했다. 현대씨름단은 이만기, 신봉민, 이태현 그리고 황규연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선수들을 배출한 명문 씨름단이다. 황 감독 입장에선 ‘마지막 프로씨름단의 마지막 감독’이 됐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실업팀 17개가 있는 만큼 당장 씨름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황 감독은 “단 하나라도 프로팀이 있어야 한다. 프로선수에 걸맞은 대접을 해야 더 좋은 선수들이 나타나고, 이들을 이기기 위해 실업팀들이 경쟁하는 체제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아쉬움도 적지 않다. “국회에서 2012년 씨름진흥법을 만들었지만, 실제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통합씨름협회도 내부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제구실을 못했다.”
그렇다고 씨름이 고사한 것은 아니다. “씨름지원법을 바탕으로 정부가 어린 선수 육성 투자에 지원하고, 씨름단에도 행정적 지원을 통해 프로팀 창단을 유도해야 한다. 협회는 관중이 씨름을 더 재밌게 즐기도록 데이터 씨름 체계를 구축하고, 씨름 지도자들은 화려한 기술씨름이 살아나도록 가르쳐야 한다.”
“씨름재단 만들고 싶다”씨름단에서 황 감독의 구실은 올해 말까지 현대삼호 선수단을 훈련하고, 영암군청 씨름단에 이들을 넘겨주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 선수들이 어느 팀에 가든지 ‘역시 현대씨름 출신들은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황 감독은 당분간 씨름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그는 현대삼호 기업의 직원으로 남아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된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내 꿈은 언젠가 어린 선수들을 돕는 씨름재단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모래판에서 부와 명예를 얻은 씨름인이 꽤 있었지만, 후배 씨름 선수들을 위해 환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다른 스포츠를 보면 선수 이름을 건 재단이 많다. 유독 씨름계에만 선수 이름을 딴 씨름 후원 재단이 없다. 옛날 선배들이 하나 만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지금 시작해도 괜찮다. 다음 세대쯤에는 뛰어난 ‘씨름 유전자’를 가진 후배들이 재단을 발판으로 모래판에 뛰어들 것이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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