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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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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도 유색인도 공 앞에선 평등하다

파시즘 배태했던 유럽 축구장 인종차별 확산 골머리
한국도 일부 선수·축구팬의 몰지각 차별 언동 위험수위
등록 2013-05-24 17:01 수정 2020-05-03 04:27

안토니오 네그리는 에서 지리적으로나 시장으로나 더 이상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본은 초국적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에 따라 저항 세력 또한 탈근대적인 양상을 보인다고 썼다. 탈영토·재영토, 즉 탈주의 드라마가 그것이다. 다중의 탈주는 권력의 장소를 버리고 지배의 영역을 이탈해 제국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강력한 계급투쟁이라고 네그리는 썼다. 그는 감격과 연대의 수사학으로 가득 찬, 2부 4장 ‘가난한 자’ 편에서 “이제 가난한 자들은 지구를 뒤덮고, 창조성과 자유에 대한 욕망으로 감싸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네그리의 ‘비관적 낙관’은, 적어도 아직 낙관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관적인 상황으로 줄달음치고 있다. 동구권 몰락과 다인종 사회의 전면화 이후 유럽 여러 곳에서 ‘발견’됐던 다중의 유효한 진지와 새로운 해방의 수로는, 그러나 적어도 유럽 각국의 축구장에서는 꽉 막혀버렸다. 유럽 각 사회의 모든 집합적 열정이 충돌하는 축구장을 보면 기존 질서의 파탄과 새로운 복합적 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모여든 수많은 관중이 적극적 의미의 다중이 되기보다는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변모하는 형국이다.
특히 이탈리아가 그렇다. 최장집 교수는 2006년 ‘이탈리아의 세리에 축구와 미국 NBA 농구’에서 이탈리아 축구계의 칼초폴리(calciopoli), 즉 유벤투스·AC밀란·피오렌티나 등이 연루된 승부조작과 뇌물 스캔들을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는 이탈리아식 부패 체계’라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치와 사회의 구조는 가족적 인간관계를 특징으로 하는데 경제시장, 국가기구, 범죄조직 그리고 축구계까지 ‘공존의 유사 가족관계’로 뒤엉켜 있어 조직적 부패 스캔들이 번성할 수밖에 없다.
파시즘 배태한 이탈리아 축구장
그 ‘유사 가족주의’는 인종차별을 배태한다. 파시즘을 낳았던 이탈리아의 축구장, 그것도 남부 쪽은 인종차별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명장으로 여러 나라와 명문 구단을 이끌었던 파비오 카펠로 현 러시아 대표팀 감독은 인종차별이 “이탈리아 서포터스로부터 전해 내려온 뿌리 깊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13일, 그런 일이 또 벌어졌다.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AS 로마의 팬들이 AC 밀란의 마리오 발로텔리와 케빈프린스 보아텡 선수에게 극심한 모욕을 안겨주었다. 경기 뒤 인터뷰에서 발로텔리는 “축구장에서 인종차별이 일어나면 아무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으나 이 사건으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나면 경기장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5월13일 경기에서 발로텔리는 인종차별 구호를 외치는 관중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장내 아나운서도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거듭했지만 결국 주심은 경기를 잠시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 97초 뒤 재개됐지만, 이 ‘판단 중지’의 상황에서 발로텔리는 보아텡과 함께 경기장을 떠나야 하는가에 대해 긴급히 논의했다. 두 선수는 논의 끝에 경기에 참여했다. 이들이 이렇게 논의한 까닭이 있다.
지난 1월3일 보아텡은 4부 리그 프로 파트리아와 가진 친선전 도중에 공을 관중석으로 차고 경기장을 나가버린 적이 있다. 극심한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보아텡은 도망친 것밖에 되지 않는다. 피하기만 해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보아텡은 물론 수많은 선수들이 블라터를 비판했다. 그 뒤 FIFA는 인종차별이 발생하면 승점 삭감, 벌금, 강등, 리그 퇴출 등 치명적인 징계 방안을 보완했다. 보아텡과 블라터는 지난 3월 22일,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에서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하기도 했다. 보아텡은 “인종차별을 한 팬에게 경기장 출입을 영원히 금지해야 하고 인종차별을 한 선수도 축구 경력을 멈추게 하는 엄격하고 명백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헤르타 베를린(2005~2007)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2009)에서 뛸 때도 동물 취급을 하는 인종차별의 모욕을 당했다.
터키 갈라타사라이에서 뛰고 있는 디디에 드로그바 역시 최근 리그 경기 중에 바나나를 흔들고 있는 원숭이 모습으로 모욕당한 일이 있었다. 드로그바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류가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하는 과정을 설명한 그림을 올리며 “이 작지만 큰 역사의 사실은 아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적기까지 했다. 구단 공식 페이스북에는 “이게 진정한 팬인가”라고 쓰며 분노했다.
이제 한국 축구도 초국적 상황으로 돌입하고 있다. 국가대표팀은 물론 개별 구단도 다양한 국제경기를 치른다. 소속 구단에 외국인 선수도 두세 명씩 있다. 아시아의 여러 구단에도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스카우트된 선수가 많다. 우리 선수들도 유럽 곳곳에서 뛰고 있다.
‘차별금지법’마저 유산된 한국은
다중의 출현이나 연대는 고사하고 ‘차별금지법’ 같은 가장 기본적인 법률 조항마저 불발되는 우리의 상황에서 축구장의 인종차별은 점점 더 중요한 사안이 될 것이다. 지난 4월, 포항 스틸러스의 노병준 선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베이징 궈안 소속 공격수 프레데릭 카누테를 겨냥한 인종차별적 문구를 썼다가 급히 내린 적 있다. 비슷한 시기에 어느 고교생은 퀸스파크레인저스(QPR)의 수비수 크리스토퍼 삼바 선수의 트위터에 인종차별의 글을 썼다가 수차례 사과한 적 있다. 긴급하고 심각한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할 것이다.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단지 ‘세리머니 조심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이 초국적·제국적 상황에서 축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 연구해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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