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경기에 졌는데 축포가 터지고 꽃가루가 휘날렸다. 선수들은 아쉬운 패배에 금세라도 눈물을 떨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장내는 축제 분위기가 연출됐고, 선수들의 미소를 ‘강요’했다.
‘믿는 구석’ 믿다가 패배
지난 2월19일 경기 안산 와동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은 2월14일 국민은행을 꺾고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것도 26승3패의 압도적인 승률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원정경기였다. 남의 집 안방에서 잔치상을 펼칠 수는 없는 법. 신한은행은 그다음 홈경기로 축제를 미뤘다. 그날이 2월19일 신세계와의 안산 경기였다.
체육관은 ‘축제’를 즐기러 온 안산 홈 팬들로 꽉 찼다. 서진원 행장을 비롯해 은행 임원진도 기대를 품고 체육관을 찾았다. 신한은행으로서는 꼭 이겨야 할 경기였다. 상대 신세계는 리그 6개 팀 중 4위에 머물고 있는 중위권 팀이다.
그런데 경기가 꼬였다. 전반을 42-42로 비겼다. 그래도 3쿼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가드 전주원과 203cm의 아시아 최장신 하은주였다. 임달식 신한은행 감독은 올 시즌 두 선수를 전반에 아껴두었다가 3쿼터에 투입해 여러 번 재미를 봤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영 슛이 들어가지 않았다. 3쿼터에 신한은행이 얻은 점수는 고작 3점. 2점슛이건 3점슛이건 슛을 마구 쏘아댔지만 12개 중 단 1개만 성공했다. 3쿼터 야투 성공률은 고작 8.3%. 신한은행은 결국 62-68로 졌다.
10연승이 끊겼고, 이날 이겼다면 ‘미스터 9할’이라는 임달식 감독의 별명에 걸맞게 9할 승률(27승3패)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기대는 한숨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지난 26번의 승리 가운데 한 경기와 이날 패배를 맞바꿀 수만 있다면.’ 꼭 이겨야 할 경기를 놓친 임달식 감독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샜을 터다.
운명의 장난이었나. 나흘 뒤 두 감독은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채 다시 맞붙었다. 2월23일 경기 부천체육관. 4위 신세계는 승리가 꼭 필요했다.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은 확정지었지만 3위로 올라가야 1위 ‘최강’ 신한은행과의 맞대결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세계는 3위 KDB생명에 1경기 차로 뒤져 있었다. 그러나 상대전적에서 1승5패로 뒤지기 때문에 동률이 되면 KDB생명이 3위, 신세계가 4위가 된다. 이날 경기를 포함해 5경기씩 남은 상황이라 신세계는 1패라도 당하면 3위 탈환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대 신한은행은 다행히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이날부터 플레이오프 대비에 들어갔다. 전주원, 하은주, 강영숙, 김단비 등 핵심 선수 4명을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이 가운데 셋은 아예 경기장에 오지도 않았다. 신한은행은 가용 선수가 7~8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세계는 경기가 풀리지 않았다. 선수들의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아니면 승리에 대한 지나친 열망이 몸을 굳게 만들었는지 골 밑에서 쉬운 슛을 자주 놓쳤고, 외곽슛도 림을 맴돌다 나왔다. 신세계는 1쿼터부터 5점 안팎으로 끌려가더니 4쿼터 막판까지 간격을 좁히지 못한 채 68-71로 졌다. 경기 전 ‘1승’을 주웠다고 생각했다가 경기 뒤 “4명이나 빠진 신한은행에도 지느냐”는 구설에 시달렸다. ‘차라리 나흘 전에 지고, 오늘 이겼더라면.’ 정인교 감독 역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자리를 뒤척였을 법하다.
프로스포츠는 장기 리그다. 수개월 동안 많은 경기를 치르다 보면 꼭 이겨야 할 경기가 있고, 져도 그만인 경우도 있다.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은 어정쩡한 2위를 달렸다. 윗집 1위와의 승차도, 아랫집 3위와의 승차도 많이 벌어졌기 때문. 이호근 감독의 선택은 빨리 2위를 확정짓고 플레이오프 체제로 전환해 편하게 경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위 확정에 1승을 남겨두고 3연패를 당했다. 3연패는 2008년 이호근 감독 부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꼭 이겨야 할 경기를 번번이 놓쳤던 삼성생명은 2월17일 신세계를 꺾고 한숨을 돌렸다.
남자프로농구에서는 2월18일 SK와 LG가 결코 져서는 안 될 경기를 놓고 맞대결을 펼쳤다. 6위까지 주어지는 플레이오프 티켓을 두고 전날까지 6위 LG는 18승23패, 7위 SK는 17승24패였다. 또 동률이 될 경우 두 팀의 맞대결 결과를 따지기 때문에 이 한판의 승부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가리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다. 더욱이 시즌 뒤 3년 계약이 끝나는 LG 강을준 감독에게는 좀 과장하면 재계약과도 직결될 수 있는 경기였다. SK 신선우 감독 역시 계약 기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자신의 이름값을 위해선 6강 진출이 절실했다. 결과는 LG의 89-80 승리.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를 잡은 LG는 6강 진출의 8부 능선을 넘었고, ‘져서는 안 될 경기’를 놓친 SK는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져도 될 경기’는 없다
2월22일에는 혈육보다 절친한 두 감독이 서로 놓칠 수 없는 경기를 놓고 맞붙었다. SK 신선우 감독과 그의 ‘분신’으로 불린 전자랜드 유도훈 감독이다. 용산고·연세대 12년 선후배인데다 현대·KCC·LG를 거치며 같은 팀에서만 14년간 감독과 선수, 감독과 코치로 함께한 사제지간이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코트는 금세 달아올랐다. 1위 KT에 1경기 차로 따라붙은 2위 전자랜드는 정규리그 우승을 위해선 이날 승리가 꼭 필요했다. 나흘 전 ‘6위 전쟁’에서 LG에 일격을 당한 SK 역시 더는 물러설 곳 없이 배수의 진을 쳤다. 결국 승리는 제자의 몫이었다.
1위 KT와 2위 전자랜드는 3월9일 정규리그 우승을 놓고 마지막 6라운드 맞대결을 벌인다. 두 팀 모두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다. 두 팀은 국내 프로농구 14년 역사상 정규리그 정상에 오른 적이 없다. KT는 지난 시즌 모비스와 40승14패로 동률을 이루고 맞대결 전적까지 3승3패로 같았으나 골득실 차로 정규리그 우승을 놓친 뼈아픈 기억이 있다. 이미 2월9일, 5라운드 맞대결에서 쓰디쓴 패배의 잔을 마셨던 전자랜드는 설욕을 벼르고 있다.
올 시즌 프로농구도 막바지다. 정규리그 막바지 승부와 플레이오프는 ‘져도 될 경기’는 없고, ‘꼭 이겨야 할 경기’만 존재할 뿐이다. 농구 코트가 봄 기온 오르듯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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