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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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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의 리그에 들어선 이방인

재계 순위권 기업들만의 ‘멤버십 클럽’ 프로야구,

기존 구단의 텃새 뚫고 제9구단 창단 나선 엔씨소프트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등록 2011-02-18 14:13 수정 2020-05-03 04:26

한 프로야구단의 사장은 프로야구를 이렇게 비유했다. “고급 멤버십 클럽이죠.”
프로야구단의 소유주가 누군지 따져보자.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삼성그룹과 현대기아차그룹이 있다. 재계 서열 3~5위인 SK·LG·롯데도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고급 사교클럽에 새로운 회원이 등장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난 2월8일 이사회를 열고 게임업체인 엔씨소프트를 경남 창원을 연고로 하는 제9구단 창단 우선협상권자로 지정했다. 엔씨소프트는 김택진(44) 대표가 서울대 전자공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1997년 3월에 창립한 회사. 14년 만에 김 대표는 대한민국에서 9명뿐인 프로야구단 구단주가 됐다.

산업으로서 프로야구는 보잘것없다. 한 구단이 1년에 쓰는 돈은 150억~200억원가량. 장부상으로는 매출액과 비용이 거의 일치한다. 즉, 8개 구단 전체로 따져도 2천억원에 못 미치는 규모다. 하지만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라는 위상은 무시할 수 없다.

KBO 총재는 청와대에서 ‘관리’하는 자리다. 2008년 12월 신상우 전 총재가 사퇴하자 청와대에서는 박종웅 전 국회의원을 총재 후보로 밀었다. 박 전 의원의 정치적 후원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부탁했다. 하지만 ‘낙하산 인사’를 달가워하지 않던 구단들은 유영구 총재를 추대했다. 이 과정을 잘 아는 인사는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총재 문제를 두고 MB에게 질책을 듣기도 했다”고 전했다. 유 총재 취임 뒤 문화부가 이례적으로 이상국 현 KBO 총재 특보의 사무총장 취임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이 특보는 유 총재 추대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프로야구단에 명목상 구단주는 따로 있지만 실질적인 오너는 재벌 기업의 주인이거나 그 후계자다. 한 삼성그룹 관계자는 ‘프로야구 선수노조가 생기면 삼성은 야구단 운영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럴 수 없다”라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야구단에 관심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2007년까지 만면 하위를 달리던 롯데 자이언츠는 올해 우승을 공언하고 있다. 왜 하필 올해일까? 2월10일자로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후계자 계승에 발맞춰 우승을 거머쥐겠다는 목표다.

44살인 김택진 대표는 기존 클럽 회원과는 이질적이다. 개인 주식 보유액이 1조원이 넘는 그는 자수성가로 부를 일군 사람이다. 재벌 2세, 또는 3세인 기존 회원과는 다르다. 엔씨소프트의 창단 문제가 처음 다뤄진 건 지난 1월11일 KBO 이사회에서였다. 당시 이사회는 “창단 심사 기준부터 만들라”며 KBO의 창단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었다. 한 회의 참석자는 “‘김택진이라서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전했다. 스포츠경제학자인 앤드루 짐볼리스트에 따르면, 구단주가 프로야구단을 소유하려는 주요 동기 가운데 하나가 ‘위신’이다. 낯선 ‘벼락부자’에게 쉽게 나눠주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2월8일 이사회를 앞두고 유영구 총재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인물은 창단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롯데의 신동빈 회장이었다.

쉽지 않을 것 같던 창단 승인은 1월11일 이사회 이후 한 달여 만에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엔씨소프트는 현명하게 행동했다. 프로야구단을 지방자치단체 통합(2010년 7월1일 창원·마산·진해가 창원시로 통합)의 상징 사업으로 여기는 창원시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김 대표는 직접 “프로야구를 현 위치까지 발전시키고 끌어오신 기존 구단들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몸을 낮췄다. KBO는 창단에 우호적인 여론 조성에 힘썼고, 기존 구단들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나타내는 데 부담을 가졌다.

전술적 승리보다 값진 건 온라인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가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들과 ‘멤버십’을 공유하게 됐다는 점이다. 게임개발사인 와이즈캣의 남민우 대표는 “게임업계 전체가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택진 대표는 게임산업에서 김정주 넥슨 회장과 함께 1세대로 꼽히는 인물이다. 게임산업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성장산업이다. 김 대표는 기존 재계에서도 주목하는 젊은 경영자다. 하지만 게임산업은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을 게임 중독에 빠뜨린다”는 비판은 대표적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언론의 비판을 견디다 못해 한 게임업체는 “돈을 쓰자”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대놓고 언론에 ‘촌지’를 줄 수는 없다. 이 업체는 자사 게임을 여러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서비스하도록 했다. 계약상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이 발생할 경우 언론사와 업체가 나눠갖게 돼 있었다. 하지만 그 ‘일정 수준’이 일반 계약 관행에 비해 매우 높았다.

엔씨소프트의 프로야구단 참여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게임업체는 장기적으로 홍보에 대한 강한 수요가 있다. 프로야구단 운영은 적자 사업이지만 구단 운영으로 얻는 홍보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홍지철 스튜디오혼 대표는 “게임사는 결국 소비재 기업이다. 소비재 기업은 자본재 기업보다 스포츠 참여로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창의’와 ‘생존’이란 기대와 우려

야구계는 엔씨소프트의 진입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당장 일자리가 늘어난다. 하지만 우려도 여전하다. 장병수 롯데 사장은 창단 논의에서 시종일관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중소 규모 기업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기 어렵다. 부실 구단이 나올 위험이 크다”고 주장했다. 과거 야구단 운영을 포기했던 삼미, 청보, 태평양, 쌍방울, 해태 등은 타 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기업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구단 행정을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한 구단 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기존 프로야구단은 ‘돈을 벌 필요가 없는 조직’이었다. 창단 실무를 맡은 이재성 엔씨소프트 상무는 2월8일 이사회가 끝난 뒤 ‘창의성’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최민규 <일간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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