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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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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코리언더비를 보다

맨체스터 트래퍼드 펍에서 박지성 응원가를 듣고,

볼턴 원더러스 구장에서 이청용 사인을 받은 축구팬의 짜릿한 순간들
등록 2010-10-13 10:19 수정 2020-05-03 04:26
9월26일 볼턴 리복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이청용 선수가 맨유의 에브라 선수와 볼을 다투고 있다.연합

9월26일 볼턴 리복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이청용 선수가 맨유의 에브라 선수와 볼을 다투고 있다.연합

지난 9월19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리버풀FC, 9월26일 맨유 대 볼턴 원더러스FC 경기를 현지에서 직접 봤다, 라고 쓰려니 왠지 다른 축구팬들에게 미안하다. 리버풀전은 특히 맨유 팬 입장에선 이번 시즌 초반 가장 큰 경기였고, 볼턴전은 박지성과 이청용의 맞대결만으로도 한국 축구 팬 모두가 주목한 경기였으니까. 어떻게든 이 두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한 달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부랴부랴 영국으로 넘어온 ‘10년째 맨유 팬’인 필자는, 결국 절반만 소원성취했다. 그러니 너무 부러워하지 마시라. 언감생심, 맨유-리버풀전은 감히 암표를 살 수 없었다. ‘빅매치’ 아니랄까 봐, 경기 한 시간 전 200파운드에서 시작한 암표값은 킥오프 10분을 지나서도 절대로 150파운드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트래포드 펍의 박지성 응원가

나는 맨유 홈구장 올드트래포드 대신 근처 트래포드 펍을 택했다. ‘원정 응원단 사절’(NO AWAY FAN)을 대문짝만 하게 붙여놓은 50년 전통의 펍, 트래포드는 맨유 팬이라면 언제고 한번쯤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다. 4년 전엔 올드트래포드 구장에서 몇 차례 경기를 봤지만, 트래포드 펍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골수팬들의 집합소답다. 두 시간 내내 뜨거웠던 열기와 함성은 경기장 못지않았다. 특히 펍은 출전선수 개개인의 플레이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전달되기에 골수팬들의 응원 방식까지 관전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청년은 초반 베르바토프의 잔실수에도 욕을 바가지로 퍼붓다가 그가 첫 골을 넣고 또 두 번째 골을 넣자 엄지손가락을 추켜들더니, 마침내 해트트릭으로 팀을 구하자 펍이 떠나갈 듯 베르바토프 응원가를 불러젖혔다.

현지 여러 매체에서 선발 출전을 예상했던 박지성은 아쉽게도 출전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서너 배의 웃돈을 주고 표를 구입한 한국 팬들은 구장에서 발을 동동 굴렀겠지만, 펍에선 지난 시즌 박지성의 리버풀 역전 골을 기억하는 현지팬들이 박지성 응원가를 세 번씩이나 불러줘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물론 박지성 응원가가 리버풀을 ‘약올리는’ 내용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난 3월 박지성 골에 “심장이 떨렸다”는 내 옆자리 청년의 표정에 그 골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간다. 무엇보다 펍은 오순도순 가족적인 분위기가 큰 매력이다. 누구 팬이냐고 묻는 앞자리 아저씨에게 긱스 팬이라고 했더니, 자신은 긱스 데뷔 때부터 팬이라고 반가워하면서 내게 기네스 원파인트를 사줄 정도다. 이 펍을, 이 분위기를 통째로 우리 동네로 옮겨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그로부터 일주일 뒤, 드디어 볼턴-맨유의 경기 날. 나는 다시 트래포드 펍에 가려다 박지성-이청용의 맞대결을 직접 ‘겪고’ 싶은 욕심을 떨칠 수 없어 새벽 버스로 볼턴 원정길에 나섰다. 나 같은 한국 팬들이 영국 전역에서 볼턴으로 몰려들었나 보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100명 가까운 한국인들이 볼턴 쪽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리안더비’에 대한 관심은 현지 언론 역시 뜨거웠다. 〈ESPN〉 카메라가 킥오프 전 경기장 주변의 태극기 물결을 찾아다녔고, 한국 팬들과 인터뷰를 나눴다. 아침 일찍 볼턴 리복 구장에 도착한 나는 운좋게도 ‘출근’하는 이청용 선수의 친필사인을 받았고, 맨유 시즌권을 두 장 가진 할아버지 팬을 만나 맨유 쪽 자리에서 경기를 보는 ‘대박’을 누렸다. 더욱이 이날은 그간 느슨하게 붙었던 코리안더비와는 다르게 팽팽했다. 박지성이 교체투입된 후반전부터 두 선수 모두 왼쪽·오른쪽 미드필더로 장군멍군 맞대결을 펼쳐 한국 팬들을 기쁘게 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에 진출한 첫해 맞붙은 맨유-토트넘전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코리안더비였다. 결국 경기는 2 대 2로 맨유 팬 입장에선 불만족스러웠지만, 한국 팬으로선 박지성과 이청용이라는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가 맞붙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잉글랜드에서 박지성이 밀어주고 이청용이 끌어주면서 한국 축구를 빛내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청용은 이제 선발 출전 여부보다 매경기 공격포인트를 올리느냐가 관심이 될 만큼 부동의 오른쪽 미드필더로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다. 잉글랜드의 레전드였던 현역 해설위원이 인터뷰에서 “그간 이청용이 저평가됐다”고 말할 만큼 시즌 2년차 징크스도 없이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박지성은 최근 챔피언스리그 발렌시아전 부진 이후 스스로 경기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지만, 내겐 그의 고백이 출전 기회를 잡고 골 욕심을 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들린다. 맨유 입단 이래 5년간 묵묵하게 팀플레이어 역할을 수행해온 그가 이제는 봉인했던 공격 본능을 되살려주기를, 그래서 발렌시아와 긱스가 부상으로 빠진 맨유를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바란다.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가 여기 있었다.

맨체스터·볼턴(영국)=이지안 축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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