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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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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만을 위한 변명

주먹 한번 써보지 못한 씨름 선수가 격투기로 전향

위험한 뇌종양 수술 감수한 그에게 우리는 너무 가혹했다
등록 2010-08-11 19:43 수정 2020-05-03 04:26

얼마 전 한국방송 에 등장한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의 모습은 반가우면서도 콧등을 시큰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최홍만이 여전히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지만, 전성기에 비해 현격하게 퇴보된 육체는 서글프게 느껴졌다.
씨름 천하장사 출신인 최홍만은 2005년 일본의 격투기 K1에 진출하며 대한민국 격투계는 물론 프로스포츠계에서도 가장 화려한 성공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그의 거대한 체구는 대한민국의 강함으로 인식됐고, 커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함은 남녀노소 모두를 그의 편으로 만들었다.
2005년 9월 미국의 ‘야수’ 밥 샙(35)과 K1 월드그랑프리에서 맞붙어 승리했을 때만 해도 세상은 당분간 최홍만의 것일 듯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짧은 수련 기간의 한계가 드러나며 단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승리보다는 패배하는 경기가 많아졌다. 가끔씩 승리할 때도 있었으나 상대는 주최 쪽에서 이기라고 붙여준 40대 노장 혹은 야구 선수 출신의 비전문 파이터였다. 2009년 들어 최홍만은 자신보다 40cm나 작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선수에게까지 패하며 주최사가 바라는 최소한의 경기력도 지켜내지 못했다. 이후 K1과의 계약을 종료한 그는 일본에서 영화나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간간이 복귀설을 이야기한다.
수술 뒤 20kg 빠진 몸으로 링에

2005년 3월19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K1 월드그랑프리 대회에서 최홍만이 무에타이의 황제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2005년 3월19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K1 월드그랑프리 대회에서 최홍만이 무에타이의 황제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최홍만의 위상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한때 그를 응원하던 사람들도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 비난을 만들어낸 씨앗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역시 떨어지는 격투기 선수로서의 능력이었다. 사람들은 최홍만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링 위에서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 20대 중반까지 씨름 선수로 활동하며 원투 스트레이트 한 번 쳐보지 못한 최홍만이 제대로 된 킥복싱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됐다.

2005년 K1이 최홍만의 영입을 결정한 것은 일본 내 시청률 상승과 대한민국 시장 개척이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TV 시청률에 목맬 수밖에 없는 비즈니스의 특성상 K1은 정통 킥복서를 비롯해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밥 샙이나 스모 챔피언 출신의 아케보노(41) 같은 엔터테인먼트형 파이터를 선호했던 것이 사실이다. 218cm의 한국 씨름 챔피언 최홍만은 그들의 시청률 상승 프로젝트에 부합하는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거대한 체구에 씨름으로 다져진 몸이었기에 격투에 대처하는 적응력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주최 쪽에서 계속 약한 상대만 붙여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한 선수들과 대결하기 시작하자 얕은 격투 실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후 수술 문제까지 터지며 최홍만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약해졌고, 더 이상 격투기다운 파이팅을 하지 못했다.

최홍만의 격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은 2008년의 뇌종양 수술이었다. 보통 장기에서 종양을 제거하는 것도 큰 수술인데, 최홍만은 어떤 인체 기관보다도 정교한 뇌에 있던 치명적인 악성 종양을 도려냈다. 성장호르몬 분비에 변화가 생겼고 몸무게가 20kg 이상 줄었다. 보통 사람이 20kg을 잃었다면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을 법한데, 최홍만은 그 몸으로 링 위에 올랐다. 물론 최홍만도 이 문제에서 영리한 대처를 보여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뇌종양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며 거짓말을 했고, 곧이어 터진 군대 문제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로 팬들의 비난을 샀다. 대중은 그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우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악성 종양을 떼어낸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어떤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었을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몸집이 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취급한 것은 아닐까. 그가 진실을 밝히지 못한 이유에는 K1과의 계약, 갑자기 얻은 인기를 지키고 싶은 마음, 주변과의 금전적 관계 등 여러 가지 배경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는 은퇴 경기를

이후 최홍만은 미니홈피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등 감정적 불안함을 노출했고,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신경질적 반응으로 일관했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 주 활동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 움직임은 대중의 최홍만 비하를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았다. 2009년 최홍만은 이라는 영화에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위 무사로 등장하며 ‘매국노’ ‘친일파’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영화를 보지 못해 더 이상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국내 정서를 뻔히 아는 최홍만의 매니지먼트 쪽의 대처가 아쉬운 결정이었다.

최홍만이 연내에 복귀전을 치른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이제 그의 부활을 기대하는 전문가도 팬도 없다. 이미 한창 링에 오르던 시절에 비해 근육의 양과 체형이 많이 변했고, 오랜 시간 제대로 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기에 진정한 격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최홍만이 단 한 번의 열정적인 경기를 국내에서 치르고 은퇴했으면 한다. 현재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그것마저도 힘든 도전이 되겠지만,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불살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파이팅을 하고 링에서 내려왔으면 좋겠다. 수많은 안티팬들이 바란 것은 어쩌면 단 하나, 포기하지 않는 최홍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팬들의 마음은 급격하게 바뀔 수 있다. 나쁘게 말하면 얄팍하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욕하는 것은 최홍만의 심장이 아닌 무대 위 혹은 TV에서 보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최홍만의 파이터 경력이 좋은 끝을 맺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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