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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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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게임보다 가슴 졸이는 조추첨


월드컵 시작 전부터 좌절 맛보게 하는 ‘죽음의 조’ 역사…
둥근 공만큼이나 누가 살아남을지는 예측 불허
등록 2009-12-18 16:05 수정 2020-05-03 04:25

“이번 조 추첨식은 이탈리아를 ‘죽음의 조’로 밀어넣은 행사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조 추첨식이 끝난 뒤 프랑코 카라로 이탈리아 축구협회 회장이 한 말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월드컵 ‘죽음의 조’의 유래라고도 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르웨이, 아일랜드, 멕시코와 함께 E조에 편성됐다. 네 팀은 역대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가장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서로 물고 물리며 똑같이 1승1무1패로 승점(4점)과 득실차(0)까지 같았다. 결국 다득점으로 멕시코(3득점 3실점)가 조 1위를 차지했고, 아일랜드와 이탈리아(2득점 2실점)가 승자승 원칙에 따라 2위와 3위(와일드카드)로 나란히 16강에 올랐다. 노르웨이는 1실점만 하고도 득점이 1점에 그쳐 ‘죽음의 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가 속한 F조가 ‘죽음의 조’로 불렸다. 사투 결과 우승 후보로까지 손꼽혔던 아르헨티나가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진 뒤 경기장에 누워 상대편 선수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아르헨티나 크레스포의 모습이 처량하다. REUTERS/ KAI PFAFFENBACH

2002년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가 속한 F조가 ‘죽음의 조’로 불렸다. 사투 결과 우승 후보로까지 손꼽혔던 아르헨티나가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진 뒤 경기장에 누워 상대편 선수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아르헨티나 크레스포의 모습이 처량하다. REUTERS/ KAI PFAFFENBACH

‘죽음의 조’라는 말은 1994년 처음 사용된 듯

죽음의 조는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강팀들이 한 그룹에 묶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력이 평준화한 요즘엔 중상위권 네 팀이 한 조에 묶여 어떤 팀이 조별리그를 통과할지 예측하기 어려울 때도 ‘죽음의 조’라고 말한다. 그래서 조별리그가 끝난 뒤에야 뒤늦게 ‘죽음의 조’로 판명나는 경우도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식 때 일이다. 잉글랜드는 세계 랭킹에서 밀려 아쉽게 시드를 배정받지 못했다. 스벤 예란 에릭손 당시 잉글랜드 감독은 “(강력한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만 피하면 다행”이라고 했다. 시드국 아르헨티나가 F조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어 운명의 장난이 시작됐다. 에릭손 감독이 간절히 피하고 싶었던 F조에 잉글랜드가 들어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세 번째 F조에 편성된 나라는 “잉글랜드보다 강하다”는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은 에릭손 감독의 조국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최강 나이지리아가 F조를 뽑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팀들이 우글거리는 월드컵 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가 탄생한 것이다. 뚜껑이 열리자, 죽음의 조의 희생양은 아르헨티나로 드러났다. 에릭손 감독의 잉글랜드는 자신의 조국 스웨덴과 나란히 1승2무(승점 5점)로 16강에 올랐고,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에 0-1로 덜미가 잡히는 바람에 1승1무1패(승점 4점)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조 추첨식이 끝난 뒤 이탈리아가 ‘죽음의 조’로 내몰린 것을 두고 이탈리아의 한 언론이 음모론을 제기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시드 배정을 받고서도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2위 체코, 랭킹 8위 미국, 아프리카의 강호 가나와 함께 E조에 편성됐다. 그러자 이탈리아 TV채널 는 “추첨을 했던 독일의 축구 영웅 로타르 마테우스가 부정한 방법으로 미국을 이탈리아와 같은 조에 넣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와 북중미 국가들이 속한 4그룹은 국가 표시 공이 따뜻한 공과 차가운 공으로 구분돼 만져보기만 해도 국가 식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마테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흥분했다. 조제프 블라터 FIFA 회장 역시 “축구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인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며 의미를 축소해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탈리아도 2승1무, 조 1위로 당당히 16강에 올랐다.

3위 와일드카드가 없어져 조별리그 더욱 치열

독일 월드컵 때는 국내 누리꾼들 사이에 C조와 E조를 두고 “진짜 죽음의 조가 어디냐”는 논쟁이 붙었다. 애초 언론은 월드컵 2회 우승의 아르헨티나, 2회 준우승의 네덜란드, 검은 돌풍을 예고한 코트디부아르, 옛 유고 연방인 동유럽의 강호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속한 C조를 ‘죽음의 조’라고 보도했는데, 많은 누리꾼들이 E조가 진짜 죽음의 조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C조는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가 나란히 2승1무로 쉽게 16강에 오른 반면 E조는 가나(2승1패)의 돌풍으로 쉽게 16강이 가려지지 않았다. 결국 누리꾼들이 승리한 셈이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고만고만한 팀들이 묶인’ A조가 ‘죽음의 조’로 떠올랐다. REUTERS/ KAI PFAFFENBACH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고만고만한 팀들이 묶인’ A조가 ‘죽음의 조’로 떠올랐다. REUTERS/ KAI PFAFFENBACH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때는 2차 리그 C조에 월드컵 우승을 맛본 세 나라가 모였다. 월드컵 참가국은 이 대회부터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어났는데, 먼저 4개국씩 6개 조가 1차 조별리그를 벌여 1·2위 팀 12개국이 2차 리그에 진출했고, 다시 12개 팀을 3개 팀씩 4개 조로 나누어 1위 팀만 4강에 올랐다. 그런데 2차 리그 C조에는 당시까지 월드컵 3회 우승국 브라질, 2회 우승국 이탈리아, 직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가 속했다. 그런데 1차 조별리그에서 폴란드·페루·카메룬과 모두 비겨 3무승부, 조 2위로 간신히 2차 리그에 턱걸이한 이탈리아가 돌풍을 일으켰다.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를 2-1, 브라질을 3-2로 침몰시키고 가볍게 4강에 올라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역시 24개 팀이 참가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전 대회 준우승팀 서독, 축구 종가 스코틀랜드, 북유럽의 강호 덴마크, 남미의 강자 우루과이가 속한 E조가 죽음의 조였다. 예상을 깨고 덴마크가 3전 전승으로 조 1위를 차지했고, 서독(1승1무1패)과 우루과이(2무1패·와일드 카드)가 조 2·3위로 간신히 16강에 올랐다. 스코틀랜드는 1무2패로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는 본선 참가국이 24개국에서 32개국으로 늘어났다. 조별리그는 4개 팀씩 8개 조로 나뉘었다. 참가국은 늘었지만 조별리그는 3위 와일드카드가 없어져 더욱 치열해 졌다. 각 조 4팀 중 1·2위만이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 당시 죽음의 조는 스페인·나이지리아·파라과이·불가리아가 속한 D조였다. 돌풍의 팀은 나이지리아였다. 나이지리아는 첫 경기에서 ‘무적함대’ 스페인을 3-2로 제압했다. 이어 불가리아를 1-0으로 제압하며 2연승을 달렸고, 마지막 파라과이 전에서 1-3으로 졌지만 2승1패,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2무승부로 탈락 위기에 몰렸던 파라과이는 마지막 경기에서 나이지리아에 승리를 거두고 천신만고 끝에 1승2무로 16강에 올랐다. 반면 스페인은 라울, 이에로, 엔리케, 모리엔테스 등 호화 진용을 앞세우고도 첫 경기에서 나이지리아에 2-3으로 덜미가 잡힌 뒤 파라과이와도 0-0으로 비겼다. 마지막 경기에서 불가리아를 6-1로 맹폭했지만 조 3위(1승1무1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죽음의 조’ 탈출해 돌풍 일으킬 팀 이번엔 어디?

2010 남아공 월드컵 조 추첨에서도 어김없이 죽음의 조가 탄생했다. A조(남아공·멕시코·우루과이·프랑스)와 D조(독일·세르비아·오스트레일리아·가나), G조(브라질·포르투갈·코트디부아르·북한)다. A조는 고만고만한 팀들이 우글거린다. 남아공이 가장 약해 보이지만 개최국이 본선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결코 ‘1약’으로 분류할 수 없다. D조는 독일이 FIFA 랭킹에서는 6위로 가장 앞서지만 전력이 많이 약해졌고, 세르비아와 호주는 FIFA 랭킹 20위와 21위로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다. 게다가 가나는 FIFA 랭킹은 37위지만 지난 대회에서도 조별리그에서 ‘검은 돌풍’을 일으킨 팀이다. G조는 강력한 우승 후보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틈바구니에서 디디에 드로그바가 이끄는 복병 코트디부아르가 도사리고 있다. 또 44년 만에 본선에 오른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의 기적을 재연할 수 있을지도 우리로선 큰 관심사다. 과연 어떤 팀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고, 어떤 팀이 일찌감치 보따리를 쌀지 축구팬들의 마음은 벌써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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