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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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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가족주의가 만나면

2세 스포츠 스타들과 부모 손에 이끌려 운동하는 어린이들…
선수로서 성공은 ‘가족 비즈니스’
등록 2009-05-28 11:43 수정 2020-05-03 04:25

얼마 전 2008~2009 시즌을 끝낸 프로농구에서는 사상 최초로 남매 최우수선수상(MVP) 수상자가 나올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누나인 하은주 선수가 소속팀 신한은행의 세 시즌 연속 통합 우승에 기여하며 챔피언 결정전 MVP를 받았고, 국내 무대로 돌아온 동생이 챔프전에서 ‘하승진 시리즈’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활약을 펼치면서 최초의 남매 MVP 수상이 점쳐졌다. 하승진 선수 대신에 추승균 선수가 MVP를 받아 남매 수상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2m가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하은주·하승진 남매가 앞으로 한국 프로농구를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사실에는 많은 이가 공감한다.

스포츠의 역사가 쌓이면서 2세 스포츠인들의 전성시대가 오고 있다. 대표적 2세 선수인 하승진·하은주 남매, 김계령, 기성용(왼쪽부터 사진/ 연합, 한겨레 이정아 기자, 연합, 한겨레 김명진 기자)

스포츠의 역사가 쌓이면서 2세 스포츠인들의 전성시대가 오고 있다. 대표적 2세 선수인 하승진·하은주 남매, 김계령, 기성용(왼쪽부터 사진/ 연합, 한겨레 이정아 기자, 연합, 한겨레 김명진 기자)

부모 신체조건·네트워크 함께 물려받아

하은주·하승진 선수를 비롯해 요즘 스포츠계에서는 이른바 ‘2세 선수’들의 등장과 선전이 돋보인다. 하은주·하승진 남매의 아버지는 국내 최장신 센터로 이름을 날렸던 농구선수 하동기씨다. 여자프로농구 김계령 선수는 아시아경기대회 육상에서 여성 최초로 한국에 금메달을 선사한 백옥자씨가 어머니이고, 아버지 또한 농구선수 출신이다. ‘혜성같이 나타난’ 축구선수 기성용의 아버지가 축구감독을 거친 축구인이라는 사실 또한 유명하다.

물론 다른 분야도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나 스포츠에서는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하려면 선천적인 신체 조건, 주니어 시절의 교육 등 참 많은 조건과 시간이 필요하다. 유망주였다가도 어느 시기에 팀(선택) 문제 등으로 인해 더 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최근 스포츠계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적 조건에 부모가 지도자나 협회 관련자로 있으면서 구축한 네트워크 등을 더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2세 선수들이 등장했다.

부모가 꼭 선수 출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선수가 처음 스포츠를 접할 때, 특히 최근에 유행하는 종목이나 여자 선수라면 부모를 따라가서 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의 선수들은 키가 크다고, 혹은 달리기를 잘해서 체육 교사의 눈에 띄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많았다. 물론 아직도 그렇지만, 요즘에는 더 적극적으로 유소년 교실 등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1998년 박세리 선수가 US오픈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골프의 ‘대중화’와 함께 ‘박세리 키즈’가 생겨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는 유소년 축구교실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증폭했다. 2008년으로 접어들어서는 박태환 선수와 김연아 선수에 힘입어 수영과 피겨스케이트를 ‘시작’하는 어린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스포츠 매니지먼트사가 급증했고, 매니지먼트사에서 어린 선수들에 대한 ‘투자’ 차원에서 유학을 보내는 모습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련의 ‘사건’들은 스포츠가 돈이 되는 ‘상품’으로 변하면서 스포츠(선수)의 ‘상품가치’를 인식할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세대는 한국 스포츠 분야에서 자본주의 담론을 처음으로 ‘활용’하고 ‘수혜’를 받는 세대라 할 수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개인적인 ‘기록’을 깨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개인적 욕망(목표)을 채워나가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스타플레이어’로서 높은 연봉을 보장받을 뿐 아니라 광고 등을 통해 어마어마한 액수를 벌어들이고 있다. 나아가 이제 그들은 미래도 보장받는다. 박태환 선수가 단국대로 진학하면서 교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배운 자에 대한 갈망 속에서 ‘스타플레이어’는 ‘몸을 쓰는 자’와 ‘배운 자’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매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동은 단순히 선수 개인의 이동이 아니라, 한 집안의 계층 이동을 가능케 하기에 스포츠는 이제 ‘가족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

아버지라는 권력에 코치의 권력까지 더해?

사실 선수 부모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박세리 선수는 “아버지가 키워냈다”. 그녀의 성공 뒤에는 반드시 ‘아버지의 노고’가 뒤따라왔다. 사적 네트워크 안의 지지자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골프(스포츠)를 지도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여기서의 ‘아버지’에겐, 선수의 사적 생활을 통제하는 가정 내 아버지로서의 권력이 오롯이 전이됨과 동시에 공적 영역인 스포츠에서 발휘되는 코치로서의 권력이 부가된다. 선수와 부모의 관계에서 ‘공’과 ‘사’가 분리되지 않으면서, 스포츠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함은 가족 안에서 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미국의 한 스포츠 전문기자는 자신의 책에서 ‘천재골프 소녀’ 위성미의 위기는 “유명한 캐디조차 무시하는 아버지의 절대권력 때문”이라고 꼬집고 있지만, 여전히 위성미에게는 아버지가 중요해 보인다.

스포츠가 갖는 ‘중립적 가치’라는 외피 속에서 더욱 강력해진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의 부정적 요소가 위력을 내뿜고 있다면 과장일까?

이김나연 언니네트워크 @asia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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