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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뗄 수 없었던 그 이름, 정치

유럽·남미 독재자들이 월드컵과 올림픽을 활용했듯이 전두환은 프로야구를 밀어부쳤으나…
등록 2009-05-20 14:12 수정 2020-05-03 04:25

지구촌이 4년마다 들썩이는 월드컵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야심으로 이탈리아가 유치했다. 남미 국가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다. 이 바람에 8강에는 모두 유럽 팀들이 올랐다. 결승전에서 파시스트식 경례가 선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협박 속에 체코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체코의 골키퍼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는 말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체코는 이 대회 준결승에서 독일을 3-1로 꺾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한테 지고 귀국한 독일 선수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따라서 2년 뒤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1982년 3월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문화방송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 때 시구를 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 한겨레 자료

1982년 3월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문화방송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 때 시구를 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 한겨레 자료

히틀러, 패배한 축구 선수들 감옥으로 보내

1930년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스포츠를 통한 통치 기법은 1970~80년대 남미와 아시아 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침서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유치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하려던 각 나라는 아르헨티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자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비델라 정권을 공개 비판하면서 불참했다. 비델라 정권은 민심을 사로잡을 승리를 따내기 위해 편파 판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다.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

스포츠를 통치에 악용한 사례로 한국도 빼놓을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2년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프로야구를 대놓고 즐길 수 없었다. 프로야구는 대표적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어쨌든 1982년 3월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문화방송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가 열렸다.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폼나게 시구를 했다(사진). 그리고 청룡 이종도의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과 삼성 투수 이선희의 눈물로 온 국민은 환희와 감동 속에 사로잡혔다. 끝내기 만루홈런은 올해까지 28년 동안 13번밖에 나오지 않은 진기록이니, 프로야구를 통치 수단으로 삼으려던 당시 권력자들의 입가엔 미소가 절로 번졌을 것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의 실업야구는 고교야구 인기 못지않았다. 무려 14개 팀이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로 나눠 경기를 펼쳤다. 기존 금융(한일은행·제일은행·상업은행·농협)과 공기업(한국전력·철도청·홍익회), 군(경리단·상무) 팀 외에 롯데와 한국화장품 등 사기업이 팀을 만들면서 프로화의 길이 열렸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백분 활용했다. 1981년 말 기업 총수들에게 프로야구단 창단을 강권했다. 그런데 호남 지역을 연고로 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전두환 신군부는 호남을 모태로 탄생한 해태에 강요하다시피 프로야구단을 떠맡겼다. 광주 학살로 성난 민심을 돌리려면 호남의 프로야구단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해태는 전두환 정권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1983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1986년부터 89년까지 프로야구 전대미문의 4연패를 달성했다. 80년대 프로야구 여덟 시즌 가운데 해태가 다섯 시즌을 석권한 것이다.

억지로 창단한 해태의 질주는 아이러니

하지만 1980년대 5월의 프로야구는 슬펐다. 아니 광주의 프로야구는 슬펐다. 5월이면 해태는 원정경기가 유난히 많았다. 특히 5·18을 전후해선 광주 무등구장에서 야구를 보기 어려웠다. 야구장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권력자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80년대 말 빙그레 이글스 투수 중에 김대중 선수가 있었다. 그가 광주 무등구장 마운드에 오르면 관중석에서 서서히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정치적 해석은 선거 때도 나타났다. 1992년 롯데가 우승하던 해에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97년엔 해태가 정상에 오른 뒤 그해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과 LG가 한국시리즈를 벌이자, 한나라당에선 적잖은 이들이 자신들의 텃밭(대구·경북)을 연고로 하는 삼성을 응원했다. 물론 야구와 선거의 함수관계는 딱 떨어지지 않았다. 삼성이 우승했지만 이회창 후보는 떨어졌으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다. 2000년대 5월의 프로야구는 흥겹다. 5·18을 앞뒤로 광주 경기를 편성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졌다. 그런데 5월5일 어린이날이 낀 3연전은 반드시 서울 잠실구장에서 LG와 두산의 라이벌전을 편성한다. 올해도 어린이날 3연전 때 두산과 LG가 명승부를 펼쳤다.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국민 스포츠’로 거듭난 2009년 5월 프로야구의 모습이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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