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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지성의 지도, 낯선 대륙들

등록 2008-06-06 00:00 수정 2020-05-03 04:25

첨예한 논쟁을 일으킨 현대 지식계의 사건들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몇 년 전부터 ‘교양’이란 이름 아래 인문 지식을 백과사전적으로 종합한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도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 펴냄), (박민영 지음, 청년사 펴냄) 등이 나왔고 (한길사 엮고 펴냄, 1만6천원)도 이 부류에 속한다. 지식을 두루 다뤘다는 것은 지식에 두루 결례를 범했다는 뜻일 테지만, 비전문가인 대중의 ‘교양’을 위해선 꽤 유용하다.

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재출간된 책이다. 1999년 나온 과 2002년 나온 을 뒤섞고 새로운 글들을 추가한 다음, 인문학, 문화와 예술, 사회, 과학 등 4권으로 다시 나눴다. 이쯤 되면 기획력보다는 ‘편집의 기술’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다행히 예전 글들도 읽는 맛은 여전하다. 이 책의 매력은 현대 지식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각각의 분야에 내공 깊은 전공자들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4권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은, 독자가 가장 나중에 읽고 싶어할 듯한 1권 ‘변하는 세상, 인문학의 가로지르기’다. 모두 30편의 짧은 에세이 속에 논쟁적인 현대 사상들이 압축돼 있다. 이 중에서 인권 연구의 동향, 생명과학 비판, 중국 유교 사상의 부흥, 번역, 집단기억 연구를 다룬 글 정도가 새로 쓰여졌다.

이 ‘지식의 최전선’에 놓인 사상들에서 굳이 하나의 코드를 추출한다면 ‘문화’나 ‘기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 책에선 후반부에 놓인) 김호기 교수의 글 ‘모더니티의 현재와 미래’를 1부 첫머리에 배치한 것은 옳다. 다만 김 교수의 모더니티 논의는 전공인 사회학 분야만을 다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규정하는 여러 입장들을 요약하고 이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 앤터니 기든스와 울리히 벡의 ‘성찰적 모더니티’ 개념을 소개한다.

2부 ‘가장 깊은 사유는 인간을 향한다’에서 가장 여운이 긴 글은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개체는 어떤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다’이다. 그는 유전자를 주체의 자리에 갖다놓는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이나 리처드 도킨스식 사유를 비판하기 위해 개체의 개념부터 정립한다. 그에 따르면 개체란 “그것 자체는 다른 것의 온전한 구성 요소가 되기를 거부하는 존재”, 즉 “자(自)와 타(他)를 스스로 구분하는 존재”다. 생식세포는 개체가 아니지만 인간은 특정한 얼굴을 가진 개체다. 학문의 역사는 개체를 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해 이해해왔으나, 이제는 개체로 회귀하는 사유가 요청된다. 이 원장은 ‘천박한 생물학적 결정론’이 세포 속의 특정한 물질을 생명의 본질로 보는 환원주의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글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을 괄호 안에 놓는다.

책의 3부는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인 문화사, 미시사, 일상사 등의 연구 성과를 소개한다. 특히 집단기억과 역사의 관계를 다룬 안병직 교수의 글은 동아시아의 현실을 떠올리며 음미할 만하다. 4부는 인류학·신화학·음악학·번역학을 다루고, 5부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과학학을, 6부는 문화담론으로 옮겨가는 종교학과 해체신학을 소개한다.

이 책은 현대 지식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성의 지도’다. 그러나 지도는 지도다. 낯선 땅에 직접 발을 내딛는 것은 또 다른 의지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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