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통해 대통령 탄핵안 가결 장면을 보면서, 국회의장이라는 자의 로봇 같은 거동과 의사당 바닥을 나뒹굴며 절규하는 무늬만 ‘여당’ 의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순 머릿속이 일종의 화이트아웃 상태가 되었다. 정신을 수습한 것은 그로부터 30분도 더 지나서였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겨우 대답할 말이 생각났다. “수구 대반란이지 뭐.” 아내는 무섭다고, 섬뜩하다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이런 일 한두번 겪나.” 통화가 끝나고 나는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같은 일 한두번 겪나”라고.
그러자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1979년 12월12일 밤 가로막힌 한강대교에서의 망연함, 1980년 5월17일 오후 캠퍼스에서의 “계엄군이 온다!”는 비명소리의 기억, 그리고 며칠 뒤 광주학살 소식을 접하고 전율하던 기억…. 그 더러운 기억들 위에 2004년 3월12일의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카메라의 흐린 초점이 맞춰지듯 서서히 오버랩되었다. 그리곤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갈 길이 아직 멀군.” 그러자 왠지 마음이 편안해져왔다.
‘반란’이라는 사태의 본질은 같다.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이다. 가결 직후 민주당 대변인은 “의회주의의 승리”라고 했다. 명색이 시인인 그의 입에서 “승리했지만 기쁘지 않다”는 한나라당 대표의 말보다 더 저질인 그 말이 나왔지만, 하긴 더 이상 무력 쿠데타를 할 수 없게 된 남한의 수구세력이 선택한 ‘의회 작전’이 멋지게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절치부심했을 것인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지만, 그들은 저 이상한 ‘이단자’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그에게 고개 숙이지 않았다.
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탄핵 전술이 총선용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총선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격하고 파괴적이며 ‘국민 정서상’ 결코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다. 그들 중에서 신중한 전략가들은 대부분 탄핵 처리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통령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고, 항복하지 않은 그의 목을 내리쳤다. 이것은 총선 전술이 아니라 집단적 광기의 폭발이다. 어떤 집단인가. 박정희 시대부터, 아니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전두환·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제멋대로 요리해 먹은, 그러고도 여태까지 무사했던 매판적 냉전 수구세력이며 그들이 구축해놓은 유구한 지배 시스템에 의해 양육된 세력집단이다. 김영삼 정권 5년 동안 조금 놀라다 말았고,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참고 견뎠지만 노무현 정권에까지 이르자 인내의 한계를 넘은 그들이 마침내 ‘봉기’한 것이다. 봉기와 반란에 논리가 어디 있는가. 아니 한꺼번에 뒤집어엎자는 논리보다 더 확실한 논리가 어디 있는가. 그 논리 앞에 한갓 총선이 다 무슨 말라비틀어진 총선이겠는가.
반란은 진압돼야 한다
그나마 DJ까지는 조금 위험해 보이기는 해도 크게 보면 다 ‘같은 물’이었다. 오랜 야당 생활 동안 DJ 역시 조금씩 그 시스템에 적응했고 그 시스템도 얼추 그를 받아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번에 그쳐야 했다. 그런데 노무현이라니. 채 20년도 되지 못하는 정치경력에다 학연도 지연도 집안도 한미하기 그지없고, 하다못해 운동권 경력조차도 한미한 웬 작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 대통령이 되다니 이건 정말 속된 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 않는가. 민주당의 분당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철의 공조’도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대통령이야말로 이런 사태의 본질을 가장 먼저 정확하게 인식한 당사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과의 포즈라도 취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이것이 총선 전략이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피하지도 양보하지도 않고 정면 돌파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자는 응징되어야 한다. 반란 세력의 강압에 의한 대국민 사과는 반란자들에게 명분만 쌓아주는 일이 된다. 이제 겨우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이 오랜 악의 시스템을 완전히 붕괴시킬 때까지 그들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연줄도 없이 오직 국민만을 믿고 저 징글징글한 수구세력의 시대착오적 반란에 맞서고 있는 대통령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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