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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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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병실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노래

가난과 질병 앞에 굴복하지 않는 착한 남녀들의 애틋한 부부애
“빗소리 즐기라”며 새벽창 열어놓은 남편의 배려가 나도 고맙다
등록 2013-08-10 09:35 수정 2020-05-03 04:27

<font color="#C21A1A">부부 1</font> 남편과 아내는 손을 꼭 붙잡고 함께 진료실로 들어왔다. “요즘 들어 자꾸 아프다 해서 오늘은 주사 한 대 맞히려고 데리고 나왔어요.” 뇌병변장애인 아내는 방싯방싯 웃기만 하고 남편은 아내 대신 증세를 설명한다. 남편도 몸이 성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척추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아 지체장애 3급이다. 하지만 아내 얘기를 할 때만은 깊게 파인 주름들 사이로 벙긋벙긋 웃음이 피어난다. 부부는 서로 닮았다.

<font color="#C21A1A">부부 2</font> 아내는 수술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남편은 아내의 침대 곁에 낮은 침상을 펴놓고 매일 밤 새우잠을 잔다. 아침이면 양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했다가 일이 끝나면 곧바로 병원으로 퇴근을 한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미국에서 살고 있단다. 남편은 아내 몰래 담당 의사를 찾아왔다. “아내를 살려주세요.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 때문에 고생만 한 사람입니다. 제가 젊어서 속을 많이 썩였어요.” 남편은 옛일이 생각나는지 울먹인다.

오랜 삶의 터널을 함께 통과해온 노부부가 다정히 손을 맞잡았다. 닮은 부부는 서로가 미안하고 또 고맙다.한겨레 자료

오랜 삶의 터널을 함께 통과해온 노부부가 다정히 손을 맞잡았다. 닮은 부부는 서로가 미안하고 또 고맙다.한겨레 자료

<font color="#C21A1A">부부 3</font> 남편은 올 들어 두 번째 교통사고다. 지난번에 는 가벼운 타박상이었지만 이번엔 좀 크게 다쳤다. 다리도 부러지고 팔도 부러졌다. 위아래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는 환자를 두고 아내가 타박을 시작한다. “내가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그놈의 술이 웬수지. 왜 술 먹고 자전거를 타? 정말 어쩌려고. 이혼해야 정신 차리겠어?” 남편이 아내에게 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술 안 먹을게. 다시는 사고 안 낼게. 술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세할게.” 다음날 회진을 갔더니, 부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 마주 보고 깔깔 웃고 있다.

<font color="#C21A1A">부부 4</font> 아내는 2년 전 뇌졸중으로 좌측 편마비가 왔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다. 남편은 올 3월에 폐암 진단을 받고 폐 일부를 들어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후유증으로 폐렴이 와서 몇 달을 고생했다. 더구나 6주 전에는 결핵 판정까지 받아 그 독한 결핵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서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다. 남편은 병원에 약을 타러 올 때마다 엉금엉금 걷는 아내를 꼭 동반하고 온다. 혼자 오면 빠를 텐데 뭐하러 같이 다니냐는 주위 사람 눈총에 대답한다.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요.”

<font color="#C21A1A">부부 5</font> 아내는 옌볜에서 온 조선족 동포다. 젊어서부터 일을 하도 많이 해서 관절이 다 시원치 않단다. 지금도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는데 관절이 자주 아프다. 남편은 새벽시장에 나가 공사장 일거리를 찾는다. 그것도 운이 좋은 날에나 일을 맡을 수 있다. 남편은 늘 괄괄하며 화난 사람처럼 거칠게 말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아내가 주사를 맞을 때면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누가 아내를 억울하게 하거나 해코지라도 할세라 보초 서는 사람 같다. 지난 달에는 아내가 작은 사고가 나서 며칠 입원을 했는데, 저녁 회진 때면 검은 비닐봉지에 먹을 것을 사서 병실에 나타나곤 했다. “오늘은 뭐 사가지고 오셨어요?” 내가 장난스럽게 물으면 그 거칠던 사람이 슬그머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게 미소를 짓는다. “김밥하고 요구르튼데, 선생님 하나 드실래유?”

<font color="#C21A1A">부부 6</font> 오래전 의과대학생 시절 선배 의사들의 회진을 따라 돌던 때였다. 병동에 췌장암 말기로 입원 치료 중인 남자가 있었다. 그의 늙은 아내는 남편을 곁에서 돌보고 있었다. 짧은 몇 분이었지만, 회진을 돌고 그 병실을 나오면서 거기에 들어갔던 의료진은 다 같이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아내가 죽어가는 남편을 얼마나 애틋하게 아끼는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별히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서도 아니었는데 아내의 사소한 표정과 몸짓에서 그 인상을 진하게 받았다. 복도를 걷다가 선배 의사가 학생들을 휙 돌아보고 한마디 했다. “너희들 이담에 저런 부인을 만나야 한다.”

<font color="#C21A1A">부부 7</font> 20여 년이 지났다. 나도 아내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베란다 창문이 살짝 열려 있다. 남편 이 새벽에 일어나 일부러 열어놓은 것이다. “당신이 빗소리 좋아해서 잘 들리라고 내가 좀 열어놨어.” 부부는 고맙다. 그리고 아름답다.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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