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에게 “너는 왜 항상 실과 같이 다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술에게 “너는 왜 항상 노래와 같이 다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바늘과 실도 한 몸이고, 술과 노래도 한 몸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고대에 하늘이나 산천에 제사 지낼 때 무당은 가장 신성한 음식, 곧 신의 음식인 술을 정성스럽게 올리고 나서, 공동체의 당면한 희망과 염원을 신께 아뢰고, 신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고 흥겨운 몸짓을 보였다. 이 제사 때의 무당의 비나리가 서사문학이 되고, 그 읊은 선율이 노래가 되고, 그 몸짓이 춤이 되었으니, 술은 인간 이외에 예술의 탄생을 함께한 유일한 존재였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5월제와 10월제 등 농경의례에서 술과 노래를 늘 가까이했던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풍속을 잘 전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맹한데, 젊은이들이 집을 지을 때 등가죽을 뚫어 줄을 꿰고 큰 나무를 매달고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강건함으로 여긴다. 매 5월에 밭일을 끝내고 귀신에게 제사하는 때는 밤낮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떼를 지어 가무를 즐기는데, 춤출 때는 수십 명이 함께 땅을 밟아 음률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술과 노래의 아우러짐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현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서양과 동양, 특히 우리나라는 그 수용 양태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대체로 서양은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서비스 노동인 노래를 수동적으로 ‘듣는’ 데 비해,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그 참가자들이 함께 능동적으로 노래를 ‘부른다’. 술자리에서 술 마시는 자와 노래 부르는 자의 분리는 계급적 층위를 가지면서 참가자들을 주체적 인간과 비주체적 인간으로 개별화·이원화한다. 그러나 술 마시는 자와 노래 부르는 자의 합일은 열정과 흥겨움을 한데 소통시킴으로써 노동의 고통을 함께 풀어내고, 그 힘으로 공동체의 발전과 단결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게 됐다. 한동안 우리 전통 술인 막걸리판에서는 창이나 민요를, 전통 술은 아니지만 서민의 술로 자리잡은 소주판에서는 ‘뽕짝’ 대중가요를 즐겨 불렀지만, 맥주·와인·양주 등 서양 술이 우리 술판을 점령하고, 그들의 팝송·클래식을 ‘듣는’ 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노래 ‘부르는’ 술판은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술 마시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던 배달민족의 ‘음주가무’ 전통은 도도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물결을 헤치고 굳건히 살아남았으니, 오늘 밤에도 방방곡곡의 2차 노래방에서 한껏 목청을 뽐내는 장삼이사들을 보라.
서울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 건너편 가로수길 초입에 가면 ‘트래픽’(TRAFFIC·02-3444-7359)이란 카페가 있다. 이 집 주인 오영길(54)씨는 20살부터 LP 레코드판을 수집해 현재 2만여 장을 보유하고 있다. 1980년대 초에는 경희대 앞에서 음악다방을 운영하기도 했고, 90년대 초 종로에서 음반 가게를 하다가 7년 전 이 자리에 항상 올드 팝이 흐르는 카페를 열었다. 이제는 압구정동의 명소로 자리잡은 카페다.
CD는 음질은 깨끗하지만 음을 깎아 이어붙이기 때문에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음까지 모두 포괄하는 LP판에 비하면 포근한 맛이 적다는 것이 오씨의 설명이다. 주인이자 DJ인 오씨는 손님들로부터 신청곡을 받으면, 김민기에서 비틀스에 이르기까지 카페 한 면의 벽을 꽉 채운 2만여 장의 레코드판 속에서 금세금세 찾아낸다. 30여 년 전 더벅머리 송창식의 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출 수는 없지만,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볼 일이 없을 때 한번 느긋하게 ‘트래픽’에 와보시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노래 사이의 소통(traffic)에 목말라 하시는 분, 지나간 70년대의 정서와 추억을 그리워하시는 분 말이다. 박정희는 빼고.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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