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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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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뉴스

등록 2009-03-18 23:02 수정 2020-05-03 04:25
클로징 멘트에 귀기울여봐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9시 뉴스’의 정치성… 신경민 아나운서의 ‘클로징멘트’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특별한 것이 없는 한 평소 TV를 즐겨보지는 않지만, 그나마 시간이 나면 챙겨보는 것이 ‘9시 뉴스’다. 왜 하필 메인 뉴스를 저녁 9시에 배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건대 퇴근해 집에 들어와 밥 먹고 난 뒤 TV 앞에 앉는 시간이라 그런 것일 게다. 아침에 신문을 읽고, 저녁에 TV 뉴스를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잖아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몸. 그 몸에는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는 적극적 태도보다는 그냥 눈과 귀를 열어놓고 소파에 누워버리는 소극적 태도가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9시 뉴스.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9시 뉴스.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편파적이라 시청률이 하락했다?

굳이 5공 시절의 ‘땡전 뉴스’를 거론하지 않아도, TV 뉴스가 정치적 화제로 떠오르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특정 성향의 독자 집단을 가진 신문과 달리 공중파 방송은 정치·이념·연령의 차이를 넘어 온 국민을 시청자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적 입장을 강력하고 뚜렷하게 드러내기가 힘들다. 물론 방송 뉴스도 보도와 논평을 통해 충분히 색채를 드러낼 수 있고, 사람에 따라 그것을 편파적이라 느낄 수 있겠지만, 그 편파성이라는 것도 애초에 신문매체의 기사나 칼럼, 혹은 사설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9시 뉴스가 정치적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 지난 정권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이다. 그것은 방송 뉴스가 신문을 견제하는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의 신문시장은 보수매체가 점유율 60% 이상을 기록하는 비정상적인 상황. 그 때문에 사회적 의제가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때 방송 뉴스와 PD 저널리즘이 나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주었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보수 신문들은 툭하면 지면을 통해 방송을 공격하곤 했다. 그때 보수 매체들이 방송이 편파적이라며 근거로 들이대곤 하는 것이 바로 시청률 하락이다.

하지만 뉴스 시청률은 방송의 공정성·객관성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인다. 방송 3사 모두 메인 뉴스의 시청률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10년 전만 해도 메인 뉴스의 시청률은 20% 안팎이었으나, 최근에는 방송 3사 모두 10% 안팎으로 내려앉았다. 거의 절반이 꺾인 셈인데,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라고 한다. 케이블 채널과 인터넷 뉴스가 늘어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이것이 장기적 추세라면, 뉴스 시청률의 일시적 증감은 한국의 경우 뉴스 자체의 논조보다는 그 앞에 방영되는 드라마의 시청률에 휘둘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떨어지는 것은 방송 뉴스의 시청률만이 아니다. 신문매체들의 구독률은 경영의 압박을 느낄 정도로 극적 하락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이 역시 신문의 논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방송 뉴스의 시청률은 하락해도, 그것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은 모양이다. 문화부 자료를 보니, 4년 전과 다름없이 국민의 50% 이상이 정치에 대한 정보를 방송을 통해 얻는다고 대답했다. 신문의 경우 그 비율이 20%대에서 10%대로 떨어졌다. 신문의 비중을 잡아먹은 것은 물론 인터넷이다.

덕분에 생긴 마니아층

최근 9시 뉴스가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방송 는 낙하산 사장을 앉힌 뒤 어조가 달라져, 가끔 공영방송이 아닌 국영방송을 보는 듯하다. 한국방송 뉴스도 이번 대법관 전자우편 파동처럼 가끔 한 건씩 터뜨리기도 하지만, 정권의 정책을 홍보하는 듯한 보도는 늘어난 반면 정권에서 싫어할 만한 뉴스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것들은 마지못해 뉴스의 마지막 부분에 중요하지 않은 보도들에 섞어 대충 내보낸다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사장이 바뀌고 나서 기자들이 고생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언뜻 들은 것 같다.

반면, 문화방송 는 관변단체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협공을 받고 있다. 정권의 친위대 노릇을 하는 얼치기 관변단체에서 문화방송 뉴스의 논조에 시비를 걸면, 새로이 검열 기관으로 떠오른 방통심의위에서 그 민원(?)을 받아 처리해주는 식이다. 요즘은 자고 나면 듣는 소리가 ‘징계’니, ‘사과 명령’이니 하는 소리다. 심지어 앵커가 입고 나온 옷 색깔이 검다는 것까지 시비를 거는 상황이니, 이들의 물어뜯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뿐인가? MB의 완장부대 문화체육관광부가 가세하고,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조·중·동이 지원사격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문화방송 에는 갑자기 마니아층이 생겨버렸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이다. 그날 나는 어느 잡지사 기자의 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한 잔, 두 잔, 술이 좀 들어가서 얘기할 만한 분위기가 됐는데, 주인장이 갑자기 TV를 튼다. 좌장이 손님들과 얘기를 안 하고 TV를 보겠다지 않은가. 할 수 없이 덩달아 뉴스를 보는 그 뻘쭘함이란. 그런데 주인장은 뉴스 자체보다는 클로징 멘트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앵커가 기다렸던 클로징 멘트 한마디를 하자 외치기를, “와, 신경민 앵커다”.

진정한 의미의 클로징 멘트는 앵커의 시각을 드러낸다. 뉴스가 끝날 즈음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위)로 채널이 돌아가곤 하는 것은 풍자와 패러디가 담긴 클로징 멘트를 듣기 위해서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진정한 의미의 클로징 멘트는 앵커의 시각을 드러낸다. 뉴스가 끝날 즈음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위)로 채널이 돌아가곤 하는 것은 풍자와 패러디가 담긴 클로징 멘트를 듣기 위해서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예전에 9시 뉴스의 클로징 멘트는 아무 특징 없는 텅 빈 덕담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경민-박혜진 앵커는 촌철살인의 멘트로 9시 뉴스에 새롭게 ‘캐릭터’를 창조했다. 어느 영화잡지에 실린 칼럼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클로징 멘트에 귀기울여봐.’ 툭하면 9시 뉴스를 방통심의위에 고발하는 어느 ‘듣보잡’과 거기에 화답해 징계를 남발해대는 방통심의위원장을 관객으로 초대하여, 이라는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 영화에는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가 조지프 매카시 의원에게 날리는 클로징 멘트가 나온다고 한다.

“매카시 의원이 이 상황을 창조한 건 아니다. 그는 쉽게, 그러나 꽤 성공적으로 이 상황을 이용했을 뿐이다. 카시우스가 옳았다. ‘문제는, 브루투스여,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있었던 거라네.’ 굿 나잇, 앤 굿럭.”

‘굿 나잇 앤 굿 럭’은 한국말로 옮기면, “시청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정도가 될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우리나라 방송뉴스의 클로징 멘트는 딱 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그것은 클로징 멘트가 아니라 그저 인사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클로징 멘트는 앵커의 시각을 드러내는, 인사말 앞에 붙은 짤막한 논평이다. 하지만 그것이 MB 정권이 지배하는 한국에서는 졸지에 징계의 대상이 된다. 물론 선무당이 무서워 입을 닫을 신경민 앵커가 아니다. 이번 사법 파동과 관련하여 지난 월요일 이런 멘트를 날렸다.

“몰아주기 배당에서 시작해 재판 개입 사실이 잇따라 나왔지만 보도하는 언론과 거의 보도하지 않는 언론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급기야는 일부 판사들의 조직적 사법부 파괴 공작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면서 비판적 판사와 언론을 빨간 색깔로 물들였습니다. 미디어법과 용산 참사에 이어서 법원 사태에서도 사실 그 자체를 눈감는 저널리즘이 오늘 횡행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짤막한 논평이 졸지에 징계 대상으로

신경민-박혜진 커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새로운 유형의 앵커다. 아니, 앵커는 원래 이래야 하는 거 아닌가. 풍자와 패러디가 담긴 촌철살인으로 그들은 ‘클로징 멘트’라는 것을 이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만들어놓았다. 평소 뉴스를 볼 때에는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두 방송사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뉴스가 재미없으면 채널이 아예 케이블 방송으로 날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더라? 뉴스가 끝나갈 때쯤에는 구천을 헤매던 채널이 여지없이 문화방송 9시 뉴스로 고정된다. 앞에서 인용한 칼럼의 제목처럼, 여러분도 ‘클로징 멘트에 귀기울여봐’.

<hr> 과학자의 ‘애증의 연인’ 왜 메인 뉴스는 9시에 하는 걸까, 왜 과학자는 책장 앞에서 별로 전문적이지도 않은 멘트를 하는 걸까

■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왜 방송사의 메인 뉴스는 주로 9시에 할까요?”

몇 해 전 어떤 학생이 내게 던진 뜬금없는 질문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학생에겐 아마도 이 질문이 과학적인 질문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혹시 저녁 9시라는 시간이 ‘인간의 생체리듬이 뉴스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시간’이라도 된다는 걸까? 저녁 9시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넘기는 우리 뇌 속 해마(Hippocampus)가 제일 잘 작동하거나, 세상을 이해하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 가장 활성화되는 시간이라도 되는 걸까?

어린이의 시간, 어른의 시간

9시 뉴스가 메인 뉴스가 된 가장 그럴듯한 근거는 ‘직장인의 일주기 생활 패턴 가설’이다. TV 뉴스를 주로 보는 (혹은 뉴스에 중독된) 시청자층은 중장년의 남자들.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집에 와 씻고 TV 앞에 앉는 빈도수가 가장 높은 시간대가 저녁 9시라는 주장이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은 메인 뉴스를 오후 6시에 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그만큼 퇴근이 늦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일 때문이든, 술 때문이든.

두 번째 가설은 ‘시간 고정관념 이론’. 처음에 각 방송사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저녁 9시’에 임의로 메인 뉴스를 편성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 메인 뉴스에 가장 ‘적절한’ 시간이 ‘인지적으로’ 저녁 9시가 돼버린 형국이란 설이다. SBS가 ‘한 시간 빠른 9시 뉴스’라는 ‘상대성 이론’틱한 표현으로 메인 뉴스 시간대를 저녁 8시로 앞당기고, YTN이 메인 뉴스를 밤 10시에 내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인식 속엔 ‘메인 뉴스는 역시 저녁 9시’가 자리잡은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가장 가능성이 희박한 가설은 ‘집단최면설’이다. 저녁 9시만 되면 한 방송에서 시보와 함께 “이제 어린이는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활기찬 내일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가 됩시다”라는 내용의 주문을 몽롱한 음악과 함께 틀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덕분에 저녁 9시는 어린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을 양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그리고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는 ‘9시 뉴스를 즐겨보는 것’이었다(어렸을 땐 뉴스를 즐겨보는 부모님이 어찌나 원망스러웠던지!). 이 집단최면에 걸린 우리 어른들에게 저녁 9시는 밤의 시간, 어른의 시간, 뉴스의 시간이다. 액션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사건 소식들과 역사 드라마를 초월하는 음모와 계략의 정치 뉴스는 어른들의 시간을 광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그러면 밤 11시 즈음 장동건이 ‘맥주’를 마시라고 광고를 한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캐나다처럼 밤 11시에 메인 뉴스를 하는 나라도 있다(물론 그런 나라들은 대개 오후 6시에 이미 주요 뉴스를 내보낸다). 미국 <cnn>이 메인 뉴스를 내보내는 황금 시간대는 밤 10시부터 12시(미 동부 시간). 이 시간에 잘생긴 앵커 앤더슨 쿠퍼가 멋진 발음으로 전세계 소식을 전하고, 화제의 인물을 인터뷰한다. 그러니 ‘메인 뉴스는 저녁 9시에 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우리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실 것!
과학자들 중에는 9시 뉴스에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콧대 높은 9시 뉴스가 귀한 1분을 과학자들에게 할애해줄 때가 있는데, 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보도자료를 만들어 돌리고 기자들 앞에서 실험을 재연해가며 온갖 쇼를 해야 한다. 학생이 다 했던 실험도 이 순간만큼은 지도교수가 직접 실험 벤치에 앉아 현미경을 들여다봐야 하고, 제품을 개발한 팀장이 마치 자기 혼자 다 개발한 것인 양 그들의 특허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얘기해야 한다.

과학자들 중에는 9시 뉴스에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각 외로 많다. 광우병이나 줄기세포 정도는 되어야 관심을 가져줄 텐데 이건 과학자들에게 큰 트라우마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과학자들 중에는 9시 뉴스에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각 외로 많다. 광우병이나 줄기세포 정도는 되어야 관심을 가져줄 텐데 이건 과학자들에게 큰 트라우마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뒤쪽에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자존심을 구겨가며 이런 일은 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9시 뉴스 효과’ 때문이다. ‘맛 대 맛’ 프로그램에 나간 사진으로 벽면을 도배하는 음식점 주방장의 심정으로, 과학자들도 9시 뉴스에 나갔던 자료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발표를 하고, 벤처 투자를 이끌고, 다음 연구비를 지원받으려 노력한다. 몇 년간 진행했던 연구 프로젝트의 결과 심사 날짜가 다가오면, 책임 연구자들은 방송사 기자들을 불러모을 묘책을 고심한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업적으로만 ‘9시 뉴스’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9시 뉴스에 양념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으니, 이름 하여 ‘전문가 인터뷰’다. 취재 내용과 관련해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한마디씩 코멘트를 하는 장면인데, 과학기술과 관련된 이슈가 종종 있다 보니 과학자들이 9시 뉴스에 얼굴을 비칠 일도 종종 생긴다.
많은 과학자들이 전문가 인터뷰를 하지만, 내용은 달라도 그들의 인터뷰에는 몇 가지 상투적인 공통점이 있다. 우선 배경이 하나같이 책이 많이 꽂혀 있는 책장 앞이거나 실험실 안이라는 사실이다. 전문가 냄새가 팍팍 풍기도록 하려는 것이 속셈일 텐데, 진짜 코미디는 꽂혀 있는 책들이 별로 전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나처럼 ‘전문가 인터뷰’를 볼 때마다 전문가의 코멘트보다 꽂혀 있는 책들을 유심히 보는 사람에겐 쏠쏠한 재미를 준다.)
입고 있는 옷도 하나같이 조작의 티가 난다. 의사는 환자를 보는 것도 아닌데 흰 가운을 입고 있고, 과학자는 평소 실험할 때는 잘 입지도 않던 실험 가운을 걸치고 실험장비 앞에 서서 인터뷰를 한다(보통 인터뷰를 하는 교수나 책임 연구원들은 평소에 실험 가운을 입고 실험하는 일이 별로 없다!).
취재 기자가 선호하는 인터뷰 대상자는 ‘편집하기 좋게’ 길게 얘기하지 않고 핵심을 짧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개중에 늘어지게 얘기하거나 느리게 말하는 사람도 등장하는데, 이 경우 영락없이 마무리도 제대로 못하고 코멘트 중간에 화면이 바뀌는 굴욕을 당해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전문가들이 대개 카메라를 보고 말하지 않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기자나 PD를 보며 인터뷰를 한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얘기하면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 기자들의 중론인데, 졸지에 시청자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엿듣는’ 형국이 돼버린다.

경기 스코어보다 등장하기 어려운 과학 뉴스

‘전문가 인터뷰’의 가장 큰 문제는 막상 내용이 별로 전문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인터뷰를 15분이나 찍어도 방송에는 가장 평범한 코멘트만 나간다. 그것은 기자가 전문가의 전문적인 식견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가 해도 될 말을 전문가의 입을 빌려 기사에 권위를 실으려 인터뷰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 인터뷰는 결국 이미 짜인 취재 내용에 더해지는 ‘구색 갖추기’라고나 할까.
뉴스란 중요하고, 새롭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소식을 말한다. 과학자들이 만들어내는 연구들은 모두 새로운 것들이며 게중에는 중요한 것도 많은데, 9시 뉴스가 관심의 촉수를 아직 과학에 안 뻗은 걸 보면 과학이 아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소식이 아닌 모양이다. 광우병이나 줄기세포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 텐데,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트라우마라 건들기만 해도 아프다.
과학자들에게 9시 뉴스는 애증의 연인이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9시 뉴스는 정치인들이 싸우는 얘기, 절망적인 경제 수치들, 사회에서 벌어진 각종 흉악 범죄들로 가득 채워진다. 그 안에 과학자들이 치열하게 보낸 하루는 어디에도 없다. 9시 뉴스는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정치인들의 말 한마디, 그날 있었던 스포츠 경기 스코어보다 더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에게 일깨워주는 고독한 시간이다.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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