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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모독

다시 살아난 듯한 ‘막걸리보안법’,
‘청산’에서 한계령 막걸리는 한계 없이 마시되 인터넷은 조심할지어다
등록 2009-02-11 14:23 수정 2020-05-03 04:25
‘청산’은 수원의 사랑방이다. 왼쪽부터 수원시 학예연구사 이달호 박사와 한동민 박사, 경기문화재단 이지훈씨. 사진 / 김학민

‘청산’은 수원의 사랑방이다. 왼쪽부터 수원시 학예연구사 이달호 박사와 한동민 박사, 경기문화재단 이지훈씨. 사진 / 김학민

요즈음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 사건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됐던 ‘막걸리보안법’ 이야기가 다시 장안에 회자되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가 쓴 에는 별별 막걸리보안법 사건들이 소개돼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대, 강원도 산골에 사는 어떤 농부는 동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나라가 통일되려면 박근혜를 김정일에게 시집보내면 된다”는 기묘한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같은 시기 서울의 어떤 달동네 서민은 재개발로 집을 강제 철거당하게 되자,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서 철거반원들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내뱉은 것이 화근이 돼 징역을 살았다. 북괴의 학정을 겪지 못한 이들에게 북괴에서는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고, 그곳에 가서 살아보겠다는 의사도 내포됐다 할 것이어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는 이유였다.

막걸리반공법, 또는 막걸리보안법이란 무엇인가? 이는 흔히 술자리에서 북괴를 고무·찬양하거나, 독재정권 시절 국가원수를 모독하거나, 우리 정부를 근거 없이 북괴와 비교해 비판하는 장삼이사들의 막걸리에 취해 내뱉어진 ‘허튼소리’가 발고돼 모진 고문 끝에 중죄인으로 단죄되던 지난 시절의 블랙코미디를 상징하는 언어다. 그러나 막걸리보안법 사건 모두에 막걸리가 관련돼 있지는 않다. 막걸리보안법 적용 사례들을 보면, 이웃 간의 사소한 다툼이 확대돼 무고로 이어지거나, 정보기관의 ‘한건주의’가 독재권력의 강압 통치에 편승해 사회 불평·불만 세력 적발에 악용된 사건들도 많이 있다.

물론 막걸리 몇 잔에 취해 내뱉은 몇 마디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사람들도 꽤 있겠지만, 이게 왜 막걸리 때문인가. 이 코미디극을 막걸리 몇 잔에 취한 칠칠치 못한 장삼이사의 실수로 책임지울 수 있는가. 실상은 국민의 권리와 기본적 자유를 독재권력이 마음대로 재단하고 제한할 수 있게 한 국가보안법 때문이 아닌가. 달을 보라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다. 일에 지친 농민이 노동의 고통을 위로받기 위해, 또 주머니 얇은 도시 서민이 한 끼 허기를 때우기 위해 마시는 술이 막걸리인데, 이 술에 국민을 억압하는 보안법을 끌어다 붙이는 것은, 단언하건대 막걸리에 대한 모독이다!

경기 수원시에는 내 단골 술집이 둘 있다. 그중 하나가 이번에 소개하는 ‘청산’(수원시 장안문 옆 농협 뒤·031-243-8177)이다. 처음 이 집의 여주인 이선경(39)씨를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희고 예쁘장한 얼굴에다 얇은 금테 안경이 도시의 먹물처럼 보여, 그가 안주나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또 걸퍽진 술자리 분위기를 툭툭 털며 견뎌낼 수 있을까, 혼자 속으로 조바심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둥에 붙들어맬 일이다. 이씨는 배화여자대학 전통요리학과 출신으로, 유명 백화점에서 음식 상품을 개발했고, 유명 호텔의 한식 뷔페에서도 오래 일했다. 갓 담은 듯 사각사각 씹히는 김치를 곁들인 두부김치, 톡 까면 촉촉이 조개 국물이 밴 꼬막,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을 내는 어묵탕 등 ‘청산’의 상큼한 주안상 차림에서 고수의 품격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청산’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막걸리다. 달지도 텁텁하지도 않은 그 시원한 한계령 막걸리 맛에, 날이 어스름하면 진보신당 당원에서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 지지자에 이르기까지 제 정파가 모여든다. 또 ‘청산’은 수원의 시민단체 활동가, 문화예술인 등을 비롯해 온갖 글쟁이·말쟁이들이 모여 생각과 술잔을 나누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원의 말쟁이·글쟁이들이여, 경계하라! 에비가 돌아왔다. 막걸리보안법을 상기하라! 한계령 막걸리는 한계 없이 마시되, 인터넷은 조심할지어다.

김학민 음식칼럼니스트·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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