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2009년 하반기 ‘외고 폐지론’이 교육계를 뜨겁게 달궜다. 논란을 주도한 사람은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10월30일 ‘외고 폐지 법안’(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한 정 의원은 외고를 ‘사교육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외고 폐지론은 인기를 의식한 마녀사냥이라는 반발도 제기됐지만, 그는 “마녀사냥이란 마녀가 아닌 사람을 마녀로 몰아 사냥한다는 얘기지만, 외국어고는 분명히 마녀”라며 맞불을 놓았다.
외고가 ‘마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교육 전문 작가가 쓴 (자음과모음·2006)에 일부 나와 있다. “공식적으로 학교에 내는 돈 외에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다. 학교에서는 매일 늦은 시간까지 자율학습을 시키지만, 자율학습이 없는 수요일과 주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사교육을 받는다. 국제반은 SAT(미국대입자격능력시험)와 AP(사전학점이수제)를 보강하기 위해 유학 전문 학원에 다니기도 한다.”
외고에 진학하려면 특목고 대비 학원에 의지해야 하고, 외고에 진학한 뒤에도 그 안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또다시 학원을 찾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작가는 대원외고생 학부모의 말을 인용해 “분기당 100만원이 넘는 교납금과 학기당 60만원에 이르는 스쿨버스 비용, 월평균 100만원 이상 나가는 특강료, 해외 체험 캠프 비용에 별도의 사교육비까지 합하면 월 300만원 가까이 교육비로 나간다”고 소개했다.
정두언 의원이 외고 폐지론을 내놓자 야권과 시민사회단체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외고가 대한민국 교육의 ‘만악의 근원’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사교육비 증가를 가져오는 ‘악의 축’쯤 되는 것은 분명하다”며 “첩첩이 쌓인 교육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측면에서 정두언의 외고 폐지 제안은 귀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조·중·동 등 보수 세력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외고는 그간 우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월성 교육을 통해 평준화의 폐해인 학력 저하를 줄이고 교육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해온 게 사실”이라며 “이런 외고를 사교육비 유발 등의 이유로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워 문 닫게 한다는 건 국가적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극과 극인 것처럼 해법도 180도 달랐다. 외고 폐지론의 핵심은 외고 입시에 대한 문제제기다. 일반계 고교와 달리 외고는 원하는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학교 입장에서는 당연히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는 욕심을 갖게 마련이다. 여기서 중학교의 입시학원화 우려가 발생한다. 외고 준비생의 선행학습 욕구를 공교육이 소화하지 못하니 외고 입시를 겨냥한 사교육이 창궐한다.
외고의 학생 선발권은 학생의 학교 선택권과 짝을 이룬다. 외고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학생이 더 좋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 더 좋은 학교란 대개 명문대 진학률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 자연스레 고교서열화가 이뤄진다.
외고 폐지론의 핵심은 외고 입시금지에 있다. 사교육 광풍과 중학교의 입시학원화 등 각종 부작용이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원외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학생에게 대원외고 재학생들이 인사를 건네고 있다. 연합 성연재 기자
외고의 학생 선발권이 지엽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교평준화 해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두언 의원의 외고 폐지 주장이 등장하자 진보 진영은 “외고를 없애려면 확실히 없애야 한다”며 외고의 학생 선발권 회수를 주장했다. 반면 보수 쪽에서는 “외고 문제는 더 많은 외고를 만들면 해결된다”는 논리로 맞섰다.
외고를 둘러싼 ‘마녀사냥’ 논쟁은 지난 1월26일 교육과학기술부의 외고 개편안 발표 이후 일단락됐다. 교과부는 앞으로 외고 입시에서 학과 성적을 반영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영어 내신과 면접을 강화하도록 했다. ‘입시 폐지’라는 어려운 길 대신 ‘입시 규제’라는 비교적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말이 규제지 이렇게 되면 영어 사교육을 오히려 부채질할 것이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외고 논쟁이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사교육 광풍 등 외고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제기가 집중되면 정부 차원의 ‘외고 대책’이 제시됐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외고의 역사란 곧 외고를 중심으로 뭉친 교육 기득권 세력과 기득권 해체 세력 간 투쟁의 역사였다. 외고 폐지론은 외고 대책의 결정판이었다. 만약 외고가 없어진다면, 외고가 빚어내는 모든 사회적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까? 전문가 집단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대답은 ‘아니요’다. 외고가 사라진다고 ‘외고 문제’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외고의 대부 격인 대원외고가 탄생한 것은 1984년이었다. 대원외고 설립이 공론화된 것은 그보다 앞선 1980년 10월, 이규호 당시 문교부 장관이 “영재 교육을 위해 예술·체육고교처럼 과학고교·어학고교 등 특수 고교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한 줄로 짧게 정리한 이규호 장관의 발표만 봐도 문제가 엿보인다. ‘영재 교육을 위해’라는 정책 의도와 ‘어학고교를 신설하겠다’는 정책 방안 사이의 거리다. 참여정부 때 교육부총리를 지낸 김진표 민주당 의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고 정책은 출발부터 잘못됐다. 어학 영재를 양성한다고 했는데, 어학 영재가 있을 수 있나. 어학은 어차피 도구 과목이다. 국제화·개방화 사회에서는 어떤 과목을 전공했든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학을 활용하는 것인데, 있지도 않은 ‘어학 영재’라는 개념을 교육 목표로 상정하다 보니 교육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당시에도 비슷한 논란은 있었다. 어학고교와 비교된 것이 과학고교였다. 과학고교의 경우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갈 ‘과학 영재’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에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어학 영재’는 판별 기준도 애매하고 교육의 실효성도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래서 어학 영재를 위한 외고 설립은 일단 불발에 그쳤다. 대신 ‘각종학교’ 형태의 외국어학교가 등장했다. 각종학교란 직업 기능 교육을 주로 하는 학교로, 각종학교 가운데 ‘학력 인정 학교’로 지정되면 일반 고교처럼 대학예비고사에 응시할 수 있었다.
대원외고는 1983년 외국어학교로는 처음으로 학력을 인정받는 각종학교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말 대일외고도 설립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동시에 개교했다. 1990년 한영외고가 그 뒤를 이었다.
‘외고 문제’가 본격화한 것은 1992년이었다. 이때 외고가 기어이 특목고로 지정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그때였을 뿐 문제의 씨앗은 그전부터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씨앗을 싹 틔운 세력이 바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고교평준화 해체론자였다.
1974년 고교평준화가 도입된 이래 이를 무력화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요구는 집요했다. 고교 교육의 수월성과 다양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무장한 이들은 고교평준화가 학생 성적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1989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드디어 주례방송을 통해 “현재의 고교평준화 제도는 그대로 시행하되 원하는 사람은 경쟁입시를 치러 입학할 수 있는 명문 고교를 각 지방에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고교입시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이듬해 8월 문교부가 평준화 보완 대책으로 내놓은 아이디어가 각종학교 형태로 있던 외국어학교를 특목고로 지정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외고에 1992년 신입생 전형부터 과학고·예체능고와 마찬가지로 특례를 인정해준다고 발표했다. 쉽게 말해 학교 마음대로 학생을 뽑을 수 있도록 ‘학생 선발권’을 허락한다는 이야기였다. 문교부의 ‘특혜’는 외고 인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진수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이 2009년 10월27일 ‘외고 문제 해법 모색을 위한 긴급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이종태 전 한국교육연구소 소장팀이 교육부의 의뢰를 받아 2007년 2월 발표한 ‘특수목적고등학교의 중장기 운영 방향 및 발전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그때 상황이 소개돼 있다. “이 무렵 외국어고는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명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대원이나 대일과 같은 외국어학교는 1984년 개교하면서 (각종학교로서 학교별 학생 선발이 가능했던 유연한 여건에서) 우수한 중학생을 다양한 전략으로 유치했다. 그 결과 1987년 제1회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문교부의 ‘노력’ 없이도 외국어학교 입시 경쟁이 가열됐다. 이 전 소장은 “애초부터 대학 진학을 겨냥한 교육을 주된 목적으로 한 외고의 제도화가 가능했던 것은 이런 성격을 용인하고 적극적으로 조장한 교육 당국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 전 소장은 이를 ‘고교평준화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라고 표현했다.
이 전 소장은 “외고가 그런 관행과 문화를 이끈 것이 사실이지만 외고가 없었더라도 명문대 진학 실적에 따라 고교를 서열화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교평준화를 무너뜨리려는 기득권 세력의 노력은 대원외고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고교평준화를 무너뜨리려는 기득권 세력의 노력’이 현실화된 또 다른 사례로 꼽히는 것이 자립형 사립고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교육개혁위원회의 5·31 교육개혁안의 하나로 탄생한 자사고는 ‘재단의 건학 이념에 따라 다양한 인재를 키우는 학교 모델’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자사고 설립은 쉽지 않았다. 교육개혁위원회부터 자사고가 고교평준화를 위협하고 과도한 등록금으로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귀족학교’가 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반면 자사고 찬성론자들은 고교에도 경쟁을 불어넣어 공교육의 수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경원 진보신당 교육연구위원은 “고교평준화를 보완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동안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에 1984년 대원외고가 설립되지 않았더라도 자사고와 국제고 등의 형태로 외고와 유사한 특목고가 출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고가 사회문제로 떠오른 이유는 단순히 명문대 진학 실적에만 있지 않다. 과학고나 예술고 등과 달리 외고의 경우 고교 때 전공과 상관없는 ‘명문대 인기학과’ 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대원·대일·한영외고의 1993년 대학 진학자 1455명 가운데 어문계열 진학자는 25%인 366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사회계열이나 공학계열로 진학했고, 심지어 의학계열 진학자도 많았다. 반면 과학고 학생의 이공계 진학률은 70% 이상이다.
이런 ‘입시학원화’ 부작용이 주목을 받을수록 외고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정부의 각종 ‘특목고 정상화 방안’이 나왔지만 반짝 효과를 거둔 적은 있어도 외고의 인기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 교육계를 지배하는 교육 관료의 주류가 고교평준화에 부정적이었고, 보수 언론과 상위권 대학 등 기득권 세력도 외고 개선 방안이 나올 때마다 극렬하게 반대했다.
예컨대 1994년 교육부는 특목고 학생의 ‘비교내신제’를 1999년부터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비교내신제란 학교에서의 상대 성적이 아닌 수능 성적으로 내신 점수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그 영향이 3년 갔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외고 지원율이 하락했다.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1999년 대입부터 내신 절대평가제가 도입되면서 외고생의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지원율이 다시 상승했다.
참여정부 때인 2004년 8월 교육인적자원부의 특목고 대책도 큰 효과가 없었다. ‘2008년 대입부터 특목고 동일계 특별 전형을 도입하고, 내신 상대평가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외고의 동일계열 진학률이 극히 낮아 설립 목적에 위배된다는 문제점을 극복하겠다는 의도였지만 정상화는 구호에 그쳤다. 2005년 외고 경쟁률이 잠시 낮아지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해 하반기 서울대가 통합교과형 논술을 도입하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내신도 수능도 변별력이 떨어지니 아예 논술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것이 서울대의 주장이었다. 고려대와 연세대가 이런 움직임에 동조했다.
1984년 대원외고 개교가 한국 초·중등 교육사의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원외고로부터 비롯된 외고 인기가 사교육 광풍과 고교평준화 훼손, 고교서열화 등을 유발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외고의 문제는 외고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의 본질은 외고에 대한 학부모의 비정상적 선호가 아니라, 고교평준화를 보완이 아닌 해체의 대상으로 보는 기득권 세력의 사고다. 교육부총리 출신의 김진표 의원은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의 자녀 가운데 외고 다니는 비율이 높다. 언론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현실이 (고교평준화를 위협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엄민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이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외고 폐지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외고가 없어진다 해도 시장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차별화된 학교를 만들려 할 것이다. 정말 외고가 ‘마녀’라고 생각한다면 수월성 교육을 일반 학교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일반 학교는 획일화해놓은 채 몇 개의 특별한 학교를 만들어주는 걸로 해결하려 했다. 각 일반 학교에서 교육과정의 다양화를 통해 수월성 교육을 하려면 국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니까 상대적으로 돈이 적게 드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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