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1948년에 어엿한 독립국가로 출범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이 없다면 북한뿐 아니라 그 뒤에 늘어선 사회주의국가들의 군사력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고 1960년대까지도 경제의 절반이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자주’를 부르짖는 일은 사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1964년의 베트남전 파병 결정은 미국의 강요에 마지못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우리가 자청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예전의 해외 파병과 달랐다.
동맹국들도 거부한 파병을 자청게다가 그것은 첫 번째 자청도 아니었다.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고 있던 베트남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 3개 사단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1956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베트남의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한국군을 파병해줄 수 있다”고 공언했다. 이후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1961년 11월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군을 파병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당시 베트남에 대한 본격적 개입은 꺼리는 입장이었던 케네디는 부정적으로 대답했지만, 베트남의 상황이 점점 진흙탕으로 변해가자 미국 쪽에서도 외국에서 병력을 지원받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게 된다.
마침내 1964년 5월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파병을 정식 요청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총 25개국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이에 응해 병력을 파견한 국가는 한국 이외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정도였으며 그나마 상징적 의미만 있는 소수 병력에 그쳤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직접적 연관성이 없고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던 한국은 1973년 3월까지 총 32만5천 명의 한국군을 파병해 55만 명이 참전한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국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당정 연석회의에서 베트남 파병의 명분을 “한국전쟁 때 피를 흘려준 미국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며, 1970년에는 파병 성과를 다음의 네 가지로 꼽았다. “첫째, 동맹국의 일원으로 군사적 기여를 하며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로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다. 둘째, 베트남과 미국 두 나라와 우호를 증진한다. 셋째, 국군을 현대화하고 실전 경험을 축적하며 국군의 위용을 과시해 북괴의 침략 야욕을 억제한다. 넷째,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서비스업과 건축 분야를 비롯한 국내 산업기술을 향상시킨다.”
이런 성과는 과연 실제로 나타났을까? 먼저 ‘동맹국의 일원’이라는 표현은 생각해봐야 한다. 냉전체제에서 크게 동서로 갈라져 있던 세계에서 자유 진영에 속한다는 뜻이라면 모르지만, 한-미 동맹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상의 동맹의 의무는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국한되며, 한국은 미국이 제3국의 침략을 받는 상황이 아닌 한 한반도 밖으로 병력을 보낼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적 입지 강화’ 부분은 실제와 동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보았듯 베트남전에는 미국의 가까운 동맹국들조차 참여를 꺼렸으며, 부패하고 무능하며 수립 과정의 정당성조차 의심받던 남베트남을 위해 무고한 양민을 포함한 베트남인들을 학살하는 일에 강력한 반대 여론이 국제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비동맹’ 노선을 내세우던 제3세계 국가들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한국을 ‘미국의 개’로 인식하고 냉대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일본 외의 우호세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베트남과 미국 두 나라와의 우호 증진’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우선 남베트남은 패망해버렸고, 통일 베트남과는 오히려 앙금이 남게 된 셈이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한-미 관계는 일단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얼마 뒤 미국 내에서도 반전 여론이 팽배하고 사회주의 진영과의 정면 대결보다 평화 공존을 모색하려는 분위기가 잡히면서 빛을 잃었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한사코 베트남에 파병하려던 숨은 이유 중 하나가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 미국과의 안보관계를 더욱 튼튼히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후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결정한 닉슨은 한국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준전시체제로 국민 반감 돌리려
‘국군 현대화와 실전 경험 축적’에는 수긍하는 사람이 많다. 1966년에 비밀로 맺어진 ‘브라운 각서’에 따라 미국은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와 첩보장비 개선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군의 기본 개인화기가 세계대전 때의 카빈이나 M1에서 M16으로 교체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육사 출신 장교들의 참전이 의무화됨으로써 군 지휘부가 실전 경험을 톡톡히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군사적으로는 상당한 소득이었다. 하지만 ‘북괴의 침략 야욕 억제’ 부분은 미묘하다. 당시 북한은 남한의 파병에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한때 북베트남 편에 서서 참전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국방력 증강이라는 성과도 긍정적 결과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이로써 한국 군부가 더 강해지고 비대해졌을 뿐 아니라 베트남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운 장교들이 새로운 정치 실세로 떠오르게 됐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성과는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베트남 파병의 긍정적 효과일 것이다. 미국은 참전의 대가로 감축 예정이던 차관을 오히려 더 증액해주었고, 군수용품 납품과 베트남 수출, 재건사업 참여 등의 기회를 얻은 한국 기업들은 ‘재벌’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임금 수준에 비하면 현저히 높았던 병사들의 봉급과 수당은 허덕이고 있던 한국 경제와 민생에 젖줄이 되었다. 참전 직전까지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며 성사시킨 한-일 국교 정상화 결과 8억달러의 자금을 일본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베트남전으로 국내에 유입된 자금은 약 50억달러에 이르렀음을 볼 때 그 경제적 효과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금전적 성과가 한국군 5천 명 사망, 1만6천 명 부상, 고엽제 등 장기적인 후유증,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 인명 손실 등의 대가로 충분한 것일까. 게다가 국내에 들어온 자금이 효과적으로 쓰이지 않고 정치자금이나 검은돈으로 많이 전용되었다는 최근의 분석도 있다.
이는 파병의 의도에 ‘국익’만이 아니라 정권의 이해관계도 있었다는 의심으로 이어진다. 당시 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다음 경제 발전으로 정당성을 얻으려 부심해왔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제 발전의 밑천을 얻으려고 국민 감정을 무시해가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한 결과, 광범위한 국민적 반대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새로운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신임을 높이고, 국가를 준전시체제로 편성해 사회 장악력을 높이려는 뜻에서 파병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병에서 기대한 외교적 성과는 없었고, 국내외 정세는 반공을 표방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에 박정희의 다음 선택은 유신체제였다.
압축성장 없었겠지만 남북 대화는 결실…결국 베트남전 파병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에 대항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파병을 강요하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익 내지는 정권의 이익을 고려해 파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이후의 대한민국은 ‘좀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전 파병으로 막대한 자금을 획득하고, 군부 세력의 강화와 군부 통제력 강화를 달성했다(사실 베트남 파병 이전까지는 ‘제2의 5·16’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 쿠데타 가능성이 계속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파병을 계기로 박정희는 군부 통제력을 확실히 장악했다. 그리고 군부 내에서 자신의 친위 세력이 될 만한 ‘하나회’ 등의 장교 집단을 베트남 참전 유공자 중심으로 구축했다). 대중적으로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정의의 전쟁’, 미국에의 ‘은혜 갚기’ 명분은 웬만큼 먹혀들었으며, 그것은 당시 야당이 기본적으로 파병에 부정적이었음에도 한-일회담 때만큼 적극적인 반대 투쟁에 나서지는 못한 데서 입증된다.
박정희는 이렇게 얻은 새로운 힘을 믿고 유신체제에 돌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 파병이 없었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를 압살할 만큼의 힘을 얻지 못했을 박정희 정권은 적어도 1970년대 후반에는 평화적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사라져도 다시 뛰쳐나와 정권을 잡는 신군부 역시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일찌감치 이루어지고, 오늘날까지 뿌리 깊게 남은 색깔론이나 지역감정 등 한국 정치의 병폐도 훨씬 빨리 사라졌을 것이다.
경제 발전은 ‘사상 유례없는 압축성장’을 이루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기업, 중공업, 특정 지역 중심 등의 불균등 성장 역시 없었을 것이다. 파병이 아니더라도 일본처럼 군수 지원을 통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소득을 볼 수는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견고한 경제성장이 꾸준히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파병으로 크게 인심을 잃고 만 유럽과 제3세계와의 경제교류 증진을 노려볼 수도 있었다.
외교·국방에서는 북한과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며, 이후 나타난 데탕트 분위기에 편승해 남북 대화가 훨씬 일찍부터 결실을 보았을 수도 있다. 외교관계가 미국과 일본 중심으로만 획일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도 베트남 파병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에 이은 유신체제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우리 사회를 얽어매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은 ‘아군과 적군’을 가장 뚜렷하게 나누는 계기가 되며,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저들에게 죽는다’는 피해망상을 키우는 계기도 된다. 이런 사회적 트라우마는 한국전쟁으로 이 땅에 씨앗이 뿌려졌지만, 베트남전 파병으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사상과 문화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국가보안법과 ‘빨갱이’ 담론은 베트남 파병만 없었다면 1980년대 정도에 마감되었을지 모른다.
파병의 대가, 획일성·황금만능주의무엇보다 ‘돈이면 다 된다. 아무리 지저분한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고 보자’는 인식이 폭넓게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 때문에 목숨도 버리는데, 아무 상관없는 나라에 가서 아무 상관없는 민간인을 죽이기도 하는데, 다른 무엇을 못하겠는가. 본래 급속한 경제성장에는 황금만능주의와 도덕성 상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그런 성장의 계기가 ‘용병’ 경험이었기에 더욱 심하고 악랄하게 나타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여러 병폐들, ‘정상적인 민주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극단적으로 좁은 이념 지형과 문화적 획일성, 외교·안보·경제·문화적으로 오직 미국만을 바라보는 국가 전략,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품격 없는 사회, 그리고 광적인 사교육·부동산 열풍까지도 베트남 파병 결정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용병 제도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용병이란 돈만을 바라보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며, 돈과 상관없다면 신의도 충성도 없다. 스스로를 제대로 지키려면 용병이 아니라 자기 나라, 자기 이웃을 자기 손으로 지키겠다는 정신에 불타는 군대가 필요하다.” 돈만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용병의 폐해는 그 용병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용병 스스로에게도 미치는 게 아닐까.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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