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야’ 시대를 깨뜨린 술집의 메뉴전쟁…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안주로 올라오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나
▣ 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메뉴 유레카
모 CF. 스테이크에 커피를 엎지르고 간 남자를 흘겨보는 여자. 남자의 화사한 미모를 보고는 “괜찮아요. 전 원래 이렇게 먹어요~”라며 음식을 먹는다. 놀라는 표정과 함께 새로운 스테이크 탄생의 팡파르가 울린다.
다른 업체의 CF ‘위대한 발견’편. ‘긱스’ 스타일의 남자가 싫다며 여자가 자리를 뜬다. 그녀가 남기고 간 것은 커피잔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장면 전환. 포스터에 웃고 있는 ‘긱스’를 보며 여자는 “이거 쟤가 만들었어?” 하며 한숨 쉰다.
새로운 메뉴의 ‘유레카’ 시대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음식을 향한 식품업계의 경쟁이 뜨겁다. 하지만 ‘유레카’가 다가 아니다. 아이디어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질리도록 먹고 밤새워 먹어야 한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비슷하다. “한 그릇의 접시를 내놓기 위해 봄부터 요리사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메뉴 개발자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조을형 이사는 연방 요리에 숟가락을 넣어 흘려보며 끈기를 본다. “떡 비율은 어떻게 되지?”
경기 평택에 있는 R사의 조리장에서 고성철씨는 훈제닭에다 소시지처럼 보이는 쫀득한 떡과 마카로니, 채소 등을 넣은 요리를 막 완성한 참이다. 프라이팬을 놀려 재료들을 공중으로 뒤집는 폼에서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지는데, 요리보다도 ‘저울질’에 훨씬 시간이 걸렸다. 떡의 개수를 세고 무게를 달고, 닭의 크기를 가늠하고 무게를 재고, 소스의 무게를 달고, 들어가는 당근·양파·브로콜리도 일일이 무게를 단다. 그리고 뒤쪽에 마련해둔 장부에다 적는다.
대화는 이어진다. “손에 묻히면서 먹으면 불편하니까요. 살코기만으로도 생각해볼 수는 있죠.”(고씨) “살코기만 있는 것보다 뼈까지 있는 게 좋겠지.”(조 이사) “끓여가면서 먹는 건 어떨까요.”(고씨)
접시에 놓았던 것을 휴대용 가스버너 ‘부루스타’ 위에 올리고 익혀본다.
“이렇게 되면 훨씬 연하게 국물을 만들어야죠. 졸여서 먹을 수 있도록 간도 다시 맞추고. 여기다 밥을 추가로 볶아줄 수도 있고.”(고씨) “훨씬 좋은데. 여기다 치즈를 부어버려? 이렇게 흘러내리게? 그런데 훈제닭보다는 생닭이 낫지 않을까?”(조 이사) “맛이 일정하게 나도록 하려면 이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는데요.”(고씨)
여러 가지를 조율하던 조 이사는 “내일 생닭을 사와서 다시 만들어보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훔쳐온 메뉴판이 더 많다
조 이사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부어가며 끈기를 살피고 요리 모양을 살폈다. 하지만 입에 넣은 것은 채소와 국물 조금이었다. 고씨 역시 완성한 뒤 앞접시에 어머니가 간을 볼 때보다 적은 양의 국물을 따라 조금 ‘힐끔거렸다’. “다 드셨어요?” 고씨는 담백하게 말했다. “네, 다 됐습니다.”
이 이름 모를 음식은 R사의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퓨전떡찜 브랜드 리매뉴얼의 포문을 열 메뉴 아이템이다. 하지만 이 음식이 어떻게 완성될지는 지금 이 순간 아무도 모른다. 오늘 완성한 그대로 손님상으로 올라갈 확률은? “제로죠.”(고씨) 이 요리가 손님상으로 올라가기나 할지, 그것도 모른다. 채소와 닭과 떡 마카로니를 넣어 볶은 이 ‘닭떡마카로니볶음’이 어떤 이름을 받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지금 닭을 뼈째 쳐서 만들었으니까, ‘닥쳐’가 떠오르네요.”(조 이사)
R사는 포장마차 주점인 F브랜드와, 퓨전술집 J브랜드, 퓨전떡찜 C브랜드를 갖고 있다. 이 프랜차이즈의 음식 개발은 모두 메뉴개발팀에서 맡는다. 개발자 3명이 각각 한 브랜드에 대한 책임을 맡고 조 이사가 총괄한다.
“브랜드 론칭 때부터 메뉴 개발에 신경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임원급 간부가 실무에서 메뉴 개발에 나서고 있지요.” 마케팅팀 조상철 팀장의 말이다.
얼마 전 R사 메뉴개발팀은 F브랜드의 봄 리매뉴얼 메뉴를 내놓았다. 봄과 가을에 대대적인 메뉴 개편을 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소폭의 개편이 이뤄진다. 봄과 가을 메뉴에서 놓친 최신 유행 메뉴를 추가하는 것이 여름·겨울 개편이다. 이번 봄 개편에는 13개 신규 메뉴와 하나의 신규 카테고리가 포함됐다.
조 이사는 메뉴 개발을 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심하다고 말한다. “메뉴 이름만 들어도 상상이 되는 요리는 만들지 않으려 합니다. 다른 곳과 메뉴 이름은 같더라도, 다른 것들을 추가해 색다르게 조합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귀신이 알려주더라고요.”
봄과 가을의 대대적인 개편은 빡빡한 일정으로 이루어진다. 총 6개월 중 3개월은 준비 기간이다. 초반 2개월간 4~6회의 내부 실연이 벌어진다. 이때 정해지는 메뉴 개발 가짓수는 25~30가지다. 초반 4개월간은 ‘벤치마킹’도 함께 이루어진다.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의 탕 메뉴를 위해서는 일본 삿포로, 나고야 같은 추운 지방을 많이 다녔다. “식당, 술집을 다니며 하루에 6~8끼를, 죽을 만치는 아니고 많이 먹지요.”(조 이사) 경쟁업체 시찰도 빼놓을 수 없다. 메뉴개발팀에는 자기 회사보다 다른 주점의 메뉴판이 더 많다. “슬쩍 훔쳐옵니다. 다른 업체들도 우리 메뉴판을 다 그렇게 훔쳐 가지요.”
본격적인 메뉴 개발에 들어가면 두 달 동안 거의 합숙을 하며 요리를 만든다. 임원·직원·일반인 대상의 시연회 전에는 특히 심하다. 밤을 새우며 먹어야 한다. 메뉴 개발자들은 이렇게 먹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살이 빠진다. 이번에 F브랜드의 봄 개편을 담당한 라재권씨는 세 달 동안 8kg이 빠졌다. “하루에도 같은 종류의 요리를 3~4번, 많을 때는 6~8번도 만들어 먹으니까 쳐다보기도 싫죠. 메뉴가 나오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맛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극복이 안 되네요.” 조 이사는 계속 먹으면서 만들다 보면 ‘이건 먹은 것도 아니고 안 먹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서 식욕이 없어진다고 설명한다. 고성철씨는 말한다. “메뉴 개발자의 직업병이 영양실조입니다.”
메뉴 개발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레시피(조리법) 만들기다. 요리를 잘 만드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평등하게 요리가 나오는 것이 프랜차이즈 요리다. 조 이사는 “메뉴개발팀 사람들은 모두 조리사 출신이지만 프랜차이즈의 주방에 계신 분이 모두 요리를 잘하시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계량화, 가맹점 표준화가 관건입니다.”
소스 제공 스타일과 그릇도 함께 개발
이 계량화·표준화와 함께 단가를 맞추는 일이 이루어진다. 단가에 맞춘 메뉴 재료의 조달도 관건이다. R사의 프랜차이즈 음식에도 동남아 곳곳에서 모인 재료들이 함께한다. 반게는 통째로 필리핀에서 손질을 하고, 코코넛가루를 입힌 새우는 베트남에서 주문 생산한다. 꽃게는 중국 공장에서 손질한다. 조리 재료를 납품받을 공장을 찾는 것도 메뉴개발팀의 일이다. 아무리 좋은 메뉴라고 하더라도 재료 조달이 힘들 경우 표준화가 힘든 것이다.
이렇게 식자재를 개발하는 것이 메뉴의 개발로 연결되기 때문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회사에서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5년 전에 설립된 IF큐리어스에서는 프랜차이즈점을 경영하지는 않고 식자재를 납품하면서 요리를 개발한다. 같은 재료로 다른 프랜차이즈에 다른 메뉴를 조달하기도 한다. 영업사원들도 조리장 출신으로 구성해 각 식당에 식자재를 납품하면서 요리를 가르쳐준다. IF큐리어스에서도 메뉴 리뉴얼 시기를 정하고 개발을 한다. 이 회사의 백승택 실장은 현재 봄 메뉴 개발을 끝내고 가을 메뉴 개발을 위해 베트남에 나가 있다. 예전에 한때 일본 프랜차이즈점에서 선보인 ‘둥지 샐러드’라는 메뉴의 ‘둥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장을 찾은 것이다.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다. “둥지 안에 해산물 샐러드를 담는 것인데, 이 둥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장을 찾았거든요.” 알고 있고 조리할 수 있고 내놓고 싶어도, 재료 조달이 불가능하면 메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메뉴를 개발하면서 편의를 위해 같이 제공되어야 하는 물품들(물수건, 숟가락, 휴대용 버너 등)도 정하고, 찍어 먹을 소스의 양과 제공 스타일도 정하고, 같이 내올 그릇까지 함께 개발한다. 그리고 재료 공급 공장의 생산 공정도 리매뉴얼해야 한다. 공장 라인에 걸 수 있는 라인 계통도를 그려서 현지주문생산(OEM) 공장에 접목시킨다.
R사에서는 개발팀, 마케팅팀, 임원들의 내부 시식을 거쳐 15가지 정도의 요리를 정한다. 아깝게 탈락한 것도 많다. 새우꼬치퐁듀, 크랩샐러드, 딤섬인 용미샤오마이, 가리비 그라탕 등이 탈락했다. 메뉴가 추가되면 기존에 있던 일부 메뉴도 탈락한다. 여기엔 프랜차이즈 점주들이 준 ‘점수’가 크게 반영된다. 베트남쇠고기오뎅탕, 매운단호박갈비찜, 통한치데리야끼, 칠리치즈닭갈비 등이 메뉴판에서 자리를 잃었다.
새 요리를 가지고 점주,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시식회를 연 뒤 반응을 살펴서 메뉴를 최종 확정한다. 이 과정을 거쳐 리매뉴얼 메뉴로 확정된 것은 모두 13가지. 리매뉴얼이 확정되면 점주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다. 점주들이 야간 영업을 끝내고 모일 수 있는 시간인 새벽 6시에 교육을 시작한다. 메뉴팀은 새벽 2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점주들 대상으로 쪽지 시험도 치른다. “돼지 한 마리 꼬치의 구성요소가 아닌 것은? ①토시살 ②갈매기살 ③콩팥 ④삼겹살.”
패밀리 레스토랑이 기대 수준을 높여놓다
개발된 메뉴는 마케팅팀으로 넘어간다. 메뉴판의 리매뉴얼과 마케팅팀의 프로모션 과정을 거치면 드디어 가게에서 손님의 주문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메뉴 개발이 시작된다. R사의 라재권씨는 다음 개편은 퓨전보다는 정통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가 마음속에 품은 아이디어는 뭘까? “기업 비밀입니다.”
메뉴 개발은 2000년 초부터 보편화됐다. 기존에는 호텔에서 주방장이 새로운 메뉴를 내놓는다는 개념의 ‘메뉴 개발’이 전부였다. 88올림픽과 199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에 ‘세계화한 음식의 표준’인 패밀리 레스토랑이 상륙했다. 그중에서 유럽풍의 한 프랜차이즈는 미국과 달리 메뉴 선택에서 융통성이 많았다. 이 프랜차이즈에 메뉴개발팀이 꾸려진 90년대 말이 메뉴 개발의 시초로 꼽힌다. 2000년이 되면서 일반 음식점에서도 메뉴 개발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다. 조상철 팀장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음식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여놓으면서, 일반주점에서도 쏘야(소시지야채볶음), 마요네즈 샐러드로는 연명할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IF큐리어스의 백승택 실장은 이런 진단도 내놓는다. “외환위기와 여러 분야의 구조조정을 겪은 뒤인 2000년 초반 주방장 인건비가 높아졌습니다. 그전에는 이를테면 30평 규모의 식당 주방장과 대형 매장의 주방장이 같이 월급을 받는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30평 규모의 식당에서는 주방장의 월급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이때부터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요리를 내놓는, 월급을 적게 받는 요리 ‘초짜’가 조리하더라도 맛이 비슷한 프랜차이즈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음식업체에 메뉴개발팀이 있다. 외국계 프랜차이즈도 메뉴의 한국화를 위해 메뉴개발에 나서고, 음료업계까지 뛰어들었다. 녹차커피는 한국에서 퓨전화한 대표적인 음료다. 최근 보편화한 피자의 화려한 토핑도 이런 끊임없는 메뉴개발 덕이다. 대기업 음식업체인 CJ푸드빌은 R&D사업팀을 두고 브랜드별로 2명씩 메뉴 개발자를 두고 있다. 김병필 R&D팀장은 말한다.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판매 도구가 메뉴입니다. 외식업체뿐만 아니라 호텔에서도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 같은 메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부가가치 창출과 직결됩니다.”
프랜차이즈 음식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의 저자 안병수씨의 말이다. “냉동 상태로 제공되기 때문에 방부제나 산패(지방 따위가 산화되는 것) 등의 염려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지방은 냉동 상태에서도 산패가 이뤄지거든요. 그리고 같은 맛을 내기 위해 아무래도 조미료 등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죠.”
음식업계에서도 이런 시각을 고려해 웰빙 메뉴와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요리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R사에서도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자연 재료만으로 매운 소스를 개발했다.
여러 가지로 먹는 것이 죄스러운 시절이다. 이런 노고가 섞인 음식 앞에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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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브랜드 봄 리매뉴얼의 중요한 미션은 ‘가벼운 술안주’와 ‘밥도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 충족이었다. 후자는 빠에야를 선택하는 것으로 쉽게 해결됐는데, ‘가벼운 술안주’에서는 진통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메뉴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이 ‘가벼운 술안주’는 우연히 찾아졌다. 직원 시식회에 여러 가지 튀김 메뉴가 나왔는데, 그것을 본 마케팅 직원이 이것을 ‘가벼운 술안주’로 발전시키면 어떠냐는 의견을 냈다. 꽃게, 새우, 오징어다리 등 여러 가지의 튀김을 단품 혹은 두셋씩 짝지어 ‘타파스’라는 카테고리를 구성했다. ‘타파스’란 스페인의 전채요리를 일컫는 말이다.
‘새우꼬치화지타’의 아이디어도 기상천외하게 튀어나왔다. 이전 가을 메뉴에서 새우꼬치와 면을 결합시킨 메뉴는 손님들이 별로 찾지 않아 아까운 작품이 되었다. 그래서 새우를 넣은 요리를 새롭게 개발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조을형 이사의 꿈에 완성품의 형태로 요리가 나타났다. 접시 위에 화지타를 깔고 위에 새우꼬치를 얹은 형태였다. 그전에 고객 요청 사항 중에서도 화지타를 한번 시도해보면 어떠냐는 의견이 들어왔던 참이었다. 꼬치를 화지타에 싸는 제품은 먹는 방법에서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출시 뒤 두 메뉴 모두 주점의 인기 안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