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책상과 의자들을 치우고 바닥이 드러난 ‘보틀라운지’ 카페 한복판에 열다섯 남짓한 사람이 빙 둘러섰다. 함께 ‘도넛 경제학’ 이야기를 나누자며 사람들을 모은 ‘도넛집’(인스타그램 @donutzip) 팀원들이 기다란 끈을 건넸다. 양손으로 끈을 잡고 공간이 허락하는 가장 큰 원을 만들어 내려놓은 뒤, 다음으로는 더 짧은 줄을 잡고 좀 전의 원 속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작은 원을 만들었다. 서로의 어깨가 닿다 못해 사선으로 비켜섰다.
이렇게 만든 두 개의 동그라미가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새로운 경제 모델을 상징하는 도넛이다. 안쪽 원은 주거, 소득과 일자리, 평화와 정의처럼 모든 이에게 보장돼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기초를 뜻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다운 삶이 어려워진다. 바깥쪽 원은 치명적 위기를 막는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뜻한다. 이 한계를 넘어가면 기후위기나 해양 산성화, 생물 다양성 손실 등이 일어나 지구상의 지속가능한 삶이 불가능해진다.
지표가 되는 요소들이 적힌 종이를 바닥에 늘어놓고 원 안팎을 거닐었다. 사회적·생태적 위기 시대에 인류의 삶은 두 원 사이, 도넛의 몸체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활동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대화하며 이렇게도 경제학을 배울 수 있다는 데 고무됐다. 아니, 이제는 모두가 이렇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2017년 내놓은 ‘도넛 경제학’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래 묵은 갈증이 해소됐다. 고등학생이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보며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던 이유와 대안을 알고 싶었지만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수업은 없었다. 의문을 품으면 시험공부에 방해만 될 뿐,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과 일단 그리고 봐야 하는 그래프들, 공감이 안 되던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 관한 가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경제학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책 속에 버티다 졸업했다.
‘도넛 경제학’의 저자는 나 같은 학생을 수도 없이 만나본 것 같다. 저자는 경제학을 진저리치며 포기하는 대신 용기와 집요함으로 연구한 끝에 교과서에서 듣도 보도 못한 동그란 도넛을 등장시켰다. 지구도 인간도 나 몰라라 하며 무책임하게 우상향하는 국내총생산(GDP) 그래프 대신, 떠올리면 달콤하고 다정한 도넛의 이름으로(물론 칼로리는 걱정되지만) 경제를 재설계하자고 주장한다. 덕분에 나도 자신감을 얻었다. 학과 바깥에서 공부했던 생태경제학, 여성주의 경제학과 같은 ‘비주류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나 나오던 이야기가 찬사를 받으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의 경제 모델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활동가로서는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경제 시스템 안에 자리할 기후정책이자 복지정책으로서 기본소득을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도넛 경제학이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소수의 경제학자만이 논의하던 경제 이야기를 민주화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만든 청사진을 하달하기보다 아래서부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만들어가는 비전에 진짜 힘이 있다. 저자를 포함한 여러 활동가, 연구자들이 도넛 경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이자 커뮤니티로서 ‘도넛 경제 액션 랩’(Doughnut Economics Action Lab·DEAL)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개인부터 회사, 동네, 도시까지 다양한 범위에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도넛 경제를 쉽게 배우고 적용해볼 수 있도록 돕는 각종 자료가 가득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선 소식을 듣고 당분간 더욱 찌그러질 안쪽 원과 팽창할 바깥 원이 걱정됐지만, 힘이 될 자원도 얻었다. 도넛을 맛보기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게 다른 경제 이야기를 퍼뜨릴 때다.
김주온 ‘좋아하는 일로 지구를 지킬 수 있다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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