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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팬덤이 노동인권과 만났을 때

등록 2024-10-04 21:21 수정 2024-10-09 12:08
2024년 10월2일 배가영 직장갑질119 활동가가 서울 중구 정동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안영춘 기자

2024년 10월2일 배가영 직장갑질119 활동가가 서울 중구 정동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안영춘 기자


2024년 9월13일 직장갑질119가 ‘괴롭힘으로부터 아이돌을 보호할 방법은 없을까?’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계기는 9월11일 그룹 뉴진스의 유튜브 방송이었다. 방송에서 멤버 하니는 소속사(어도어)와 경영권 갈등 상태인 모회사(하이브)의 어느 그룹 멤버들이 인사를 받고도 다 같이 외면하더니, 이어 그쪽 매니저가 “무시해”라고 대놓고 말하더라고 밝혔다.

보도자료는 5개의 질문과 답변(Q&A) 형식으로 돼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행위 자체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 불리는 근로기준법상 해당 조항의 요건에 들지만, ‘원청 갑질’은 관련 내규가 없는 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에서도 아이돌 그룹은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 기조는 ‘안타까움’이었다.

글로벌 아이돌 그룹 멤버들한테서 직장 내 괴롭힘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10월2일 직장갑질119를 찾아, 대변인 역할을 하는 배가영 상근 활동가에게 보도자료를 낸 경위를 물었다.

“뉴진스 방송을 직접 봤다. 눈물이 났다. 맞다. 나는 아이돌 팬이다. 하지만 미처 직장 내 괴롭힘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튿날 뉴진스 팬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한 걸 본 기자들한테서 잇따라 문의가 왔다. 문언대로라면 관련 법률들의 규정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아이돌 그룹의 위치성에 대해 우리도 처음 인식하고 고민해볼 수 있었다. 사각지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보도자료를 냈다.”

―노동인권과 관련해 아이돌 그룹만의 특수성은 뭐라고 보는지.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미성년자도 많다. 소속사와 전속계약을 맺었기에 근로자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양쪽 관계에서 대등성을 갖기 쉽지 않다는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연습생 시절부터 엄청난 규율로 통제를 받는 등 소속사의 지배력이 강력하다.”

―최근 직장갑질119가 폐회로티브이(CCTV)와 업무용 메신저를 통한 일터 감시 문제에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봄 강형욱 보듬컴퍼니 대표 부부의 직장 내 괴롭힘 논란이 터졌다. 법 위반이 불가피하다는 듯이 해명하는데, 댓글 반응은 오히려 매우 우호적이었다. 해명 내용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건 CCTV 감시와 메신저 검열이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보였다. 그래서 설문조사를 해봤고, 결과를 공개했다. 메신저 검열 기능 자체를 모르는 비율이 59.9%였다. 과도한 업무 감시 또한 괴롭힘으로 규정돼 있는데도, 노동 당국은 개인정보보호법 사항이라며 회피한다. 법 제도의 보완이 시급하다.”

―지난 1년 사이에 직장 내 성폭력 피해 경험 응답 비율이 늘었다는 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소폭이지만 늘기는 늘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좀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뒤로 꾸준히 줄어들던 괴롭힘 피해 경험 비율도 늘었다. 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난 건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백래시’(반동) 현상이 아닐까 우려된다.”

―백래시가 나타날 만한 요인이 있을까?

“법 시행 5년을 계기로 한겨레21이 보도(제1525호 표지이야기)했듯이, 정부와 사용자단체 중심으로 ‘지속·반복성’을 직장 내 괴롭힘 요건에 포함해야 한다는 공세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데, 그 영향이 없지 않을 거로 짐작한다. 요즘 들어오는 상담 가운데 노동청이나 노무사들이 지속·반복성이 없어서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는 내용이 적지 않다. 좋지 않은 징후다.”

―지난 한겨레21 보도에서 불만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나?

“생각나는 게 없다.(웃음) 법 시행 5주년 같은 계기가 없더라도 지속해서 관심을 갖고 취재해주기 바란다. 지금은 지엽적인 문제를 빌미 삼아 법을 퇴행시키고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할 때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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