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심기 거스르지 않게 나대지 말라.’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피고인 쪽의 허위사실 유포와 인신공격에 고통받는 피해자에게 피해자 변호사가 한 말이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닌데 왜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려 하냐는 거다. 재판부에 ‘피해자답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변호사가 가해자의 유죄가 확실하다고 장담하며 피해자는 더 이상 재판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던 몇 년 전 사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사건 1심은 재판부가 피고인의 허위 주장을 바탕으로 ‘피해자가 억울한 마음에 과장했을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변호사는 피해자의 연락을 피했고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피해자 대리를 주로 맡은 중견 변호사마저 피해자에게 이런 식의 강압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는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가 주변인, 참고인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 있다. 현재 한국의 형사사법 절차는 국가를 대리하는 검사와 피고인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으며,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피의자·피고인의 권리 보장, 즉 방어권 보장을 위한 장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국가의 형벌권 행사 과정에서 각종 인권침해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와 권리 보장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돼왔다는 데 있다. ‘실질적 당사자’로서 피해자를 인정하고자 했던 각종 시도(일본의 피해자참가제도를 모방한 2010년 법무부 형사소송법 개정안 등)는 피의자·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을 중심으로 피해자의 정보 접근성, 절차참여권 등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면서(제1467호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다’는 말’ 참조) 관련 법안, 지침 등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으나, 피해자 지위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재판기록 열람·등사만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허가하되 재판부가 불허할 경우 불복절차를 마련해 보완하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지만, 결국 허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판사다. 또한 재판에 전념하기도 힘든 피해자에게 불복 대응 책임마저 떠넘기는 형태라 피해자 부담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피해자는 범죄사실과 범죄명 등이 간략하게 기입된 공소장마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별도로 신청하지 않는 한 그 내용을 알기 어렵고(2024년부터 검찰청에서 문자메시지 등으로 피해자에게 공소장 주요 내용을 전달하고, 공소장 열람·복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현장은 보도자료 속 청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사전에 별도로 신청하거나 변호사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는 한 피해자는 공판기일에 대한 통지도 받기 어렵다.
언론에서는 법원이 허가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기록 열람·복사에만 집중하는데, 수사기록을 가진 검찰이 피해자를 외면하는 현실도 심각하다. 재판 진행 중 피해자가 검찰청에 신청해 받을 수 있는 소송기록은 피해자가 제출한 자료, 피해자 진술조서, 증거목록 정도다(이도 불허하는 검사가 있다). 법원의 경우 재판기록에 대한 열람·등사 허가 범위는 재판부마다 편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별도로 민사소송 등을 제기해 관련 기록을 확보하거나 매 공판 방청석에 앉아 관련 기록에 대해 짐작하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어떤 재판부는 피해자 증인신문조서조차 피해자에게 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피고인 쪽 전략은 갈수록 비열해지고 있다. 피해자의 성향, 사생활 등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는 물론이거니와 피해자 주변인, 조력자 등에 대한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피해자 공격’을 주요 셀링 포인트로 삼는 법무법인이 늘어나면서 법정은 그들이 내뱉는 말로 오염된다. 검사가 있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검사에게 피해자 대리 역할을 기대하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공판검사는 기계적으로 재판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피고인 쪽이 늘어놓는 허위사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확인절차를 밟는 검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피해자에게 의견진술권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사실관계’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고인 쪽 비방에 피해자가 적절히,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피해자 변호사 역시 당사자가 아닌 피해자를 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절차 참여에 한계가 있다. 그나마 최근 몇 년, 피해자나 가족, 지인 등이 재판에 적극 참여해 ‘양형증인’ 등의 방식을 이용해 의견진술을 하면서 재판부도 마지못해 피해자의 참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나, 이 역시 재판부마다 편차가 있다.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는 수사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추가·파생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법무부는 2024년 5월 ‘범죄피해자 핵심정책 7선’을 발표했고, 국회도 피해자 보호, 절차 참여 보장 등을 위한 여러 법안을 발의했으나, 이 모두 여전히 피해자가 증인, 참고인, 주변인의 지위에 머물러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착시에 불과한 변화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7월22일 국회에서 열린 ‘형사소송 절차상 성폭력 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토론회’에 참여한 안지희 변호사의 발제는 소송 주체로서 피해자의 당사자성 인정 문제를 부각하며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한다는 면에서 유의미하다.
독일은 피해자를 소송 당사자로 인정하며 일부 범죄(스토킹, 모욕, 협박 등)에 대해서는 기소권자 자격까지 부여한다. 이러한 부대공소제도에서 피해자는 상소권을 포함한 공판기일출석권, 각종 의견진술, 이의제기권, 질문권, 기피권을 보장받는 등 검사에 준해 독자적이고 광범위한 권리 행사가 가능하다. 일본은 피해자참가제도를 통해 공판기일출석권, 의견진술권, (일부) 증인신문권, 질문권 등을 보장한다. 양형에 대한 최소한의 의견진술마저 ‘판사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며 피해자 참여를 막는 한국의 현실과는 상당한 차이다.
‘당사자이되 당사자일 수 없는 피해자’의 현실을 근본부터 돌아봐야 한다. 형식적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를 배제·소외하면서 손쉽게 피해자의 무지 및 그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빌미로 응보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주변인, 참고인으로서 피해자의 지위를 고정한 채 절차 참여 범위를 기존보다 확대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피해자가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절차 전반에서 인정받을 때, 피해 복구와 일상 재구성이 가능하다. 피해자는 당사자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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