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 일명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가 2023년 5월31일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한 말이다. 2022년 여름부터 해당 사건 재판을 모니터링했지만 그가 법정에서 감정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이날 부산고등법원 301호는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피해자의 노력이 빛을 발을 발하는 자리이자, 한국 수사·재판 시스템 전반의 존재 의의에 회의감을 일으킨 장소였다.
이 사건은 2022년 5월22일 강간 등 여러 전과가 있는 피고인 이아무개(32·남)가 일면식도 없던 피해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것이다. 문제는 머리 부분을 가격당한 피해자가 기억을 잃은 상태(혹은 가격 이후 상황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해당 사건을 단순 상해 사건으로 분류한 경찰의 부실한 초동수사로 일어났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 상태를 육안으로 관찰해 단순 주취자로 판단했다고 한다. 현장 보존, 피해자 상태 분석이나 의류 전반의 섬세한 감정 등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둘러메고 폐회로텔레비전(CCTV) 사각지대로 사라진 뒤 범행 장소인 오피스텔을 빠져나오까지 7~8분간의 상황에 대한 수사를 부실하게 한 채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경찰은 ‘묻지마 범죄’(이상동기 범죄)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해, 성범죄 혐의를 입증할 수 있던 시간을 날렸다.
피해자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야 했다.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범죄의 구체적 내용을 알게 된 것은, 2022년 7월 주변의 만류에도 방청했던 첫 재판에서였다. 피해자의 재판 참여권은 법에 보장됐지만, 현실에서 피해자의 의견진술권과 소송기록 열람등사권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피해자는 영구장애 진단을 받을 정도로 일상이 무너졌지만, 형사재판의 ‘당사자’(검사와 피고인만 해당)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사·재판 기록을 보여달라는 요구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민사소송을 이용해 관련 기록을 확보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피해자는 형사 1심 재판 중에 민사소송을 시작해 선고 뒤에야 여러 자료를 확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가해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구치소에 수감된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소 등 개인정보를 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피해자는 보복범죄 위협에 노출됐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보비대칭은 피고인의 기계적 방어권 보장에 집착하는 사법계 분위기에서 비롯하는데, 이 분위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 발견이 어려워지고 피해자는 추가로 고통받는다.
특히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이미 많은 자료를 제출한 상태라며 피해자의 의견진술에 제한을 뒀다. 피해자는 자신의 의견조차 법정에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2022년 10월28일 1심 선고일을 맞았다. 이날 살인의 고의가 인정되면서 징역 12년이 선고됐지만, 피해자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시 변호사를 선임하고 시민사회에 연대를 요청하면서 본인이 민사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범행 동기를 추적했다.
항소심의 판도가 달라진 것은 언론에 이 사건이 널리 보도되면서다. 피해자가 자신의 생존과 다른 피해자를 위해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렸던 게 주효했다. 외부의 관심이 커졌고, 재판부와 검찰의 태도도 바뀌었다. 검찰은 오염 가능성이 있던 의류의 재감정을 신청했다. 재판부는 재감정 결과를 기다리면서 목격자와 최초 출동 경찰 등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했으며, 피해자의 옷을 법정에서 직접 검증했다. 결심을 앞두고 대검찰청이 재감정 결과를 통보했고, 검찰은 곧바로 성범죄 혐의를 추가한 공소장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재판 모니터링을 하며 이 내용을 확인한 나는 즉각 피해자에게 알렸고, 피해자는 사건의 실체 파악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며 결심을 기다렸다.
재감정 결과 청바지 안쪽 부위 등에서 피고인의 디엔에이(DNA)가 검출됐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바지를 벗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기에, 이 결과는 성범죄 혐의에 주요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다만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의 공소장 변경(‘살인미수’에서 ‘강간살인미수’로 변경)을 재판부가 허가할지가 쟁점이었다. 피고인 쪽은 방어권을 명분으로 공소장 변경 신청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동일하고, 항소심 공판이 실제 공소장 변경과 관련 있는 성범죄 혐의를 다뤘기에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며 허가 결정을 내렸다.
항소심 결심공판에서는 이례적으로 피고인신문도 진행됐다. ‘심신장애’를 주장하기 위해 ‘환청을 들었다’는 전략을 내세운 피고인은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로 실소를 자아냈다. 성범죄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강간’ 등 성범죄 혐의가 포함된 검색어)를 두고도 ‘관심이 있어서’라는 비상식적인 답변을 했다. 이렇게 엉성한 피고인을 두고 수사기관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기억을 잃어버린 내 탓이냐, 내가 죽었어야 했냐’며 고통스러워하던 피해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경찰은 성범죄 혐의에 대해 피해자에게 한 차례 확인만 했으면서, 나중에 초기 부실수사의 책임을 ‘기억이 없다’고 말한 피해자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왜 피해자가 피해 회복에 힘을 쏟지 못하고 수사와 재판 전부를 하나하나 짚고 심지어 끌어가야 하는가? 수사기관과 법원은 왜 있는가? 사법시스템이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 사건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이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첫 답변을 항소심 선고기일인 6월12일 듣게 될 것이다. 검찰은 ‘살인미수’에서 ‘강간살인미수’로 변경된 공소장을 토대로 징역 35년을 구형했고, 피고인은 억울하다며 항변 중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며 소외당했던 피해당사자가 끌어온 이 재판에 대해 한국 사법시스템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나는 그 답을 듣기 위해 또 부산에 갈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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