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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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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츠 중독? 기다림이 설레는 사람은 ‘긴 이야기’ 읽는다

쇼츠 대세인 시대에도 ‘의미’ 포기할 수 없는 창작자들의 고민… 이야기의 ‘깊이’ 포기하지 않으면서 독자와 소통할 방안은
등록 2024-03-30 16:46 수정 2024-04-03 23:44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하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2012년 5월 서울 지하철 객차 안 풍경. 류우종 기자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하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2012년 5월 서울 지하철 객차 안 풍경. 류우종 기자


대중교통에서 사람들이 소비하는 콘텐츠의 변화 양상이 꽤 흥미롭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보던 미디어 중 하나가 웹툰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웹툰 보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관찰자들이 입을 모은다. 대신 쇼츠(짧은 동영상)를 중심으로 한 짧은 볼거리와 웹소설을 읽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분석이 있는데, 한 회에 80~120컷 정도로 구성된 웹툰이 이전에는 버스나 전철을 기준으로 타고 내리는 호흡과 비슷했지만 지금 사람들의 호흡은 더 짧아졌다는 것이다. 사람들 출퇴근 거리가 갑자기 짧아질 리는 없으니 사람들의 ‘보는/읽는 호흡’의 길이가 그만큼 짧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콘텐츠를 보고 읽는 호흡이 짧아지다

호흡이 짧아지니 웹툰을 보는 방식도 이전보다 더 빨리 휙휙 지나가며 읽는다. 그러다 놓친 것 같으면 다시 휙 위로 돌려본다. 무엇보다 웹툰 한 회도 길다고 느낀다. 사실은 지루하다고 느끼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빨리빨리 끊어 볼 수 있는 짧은 것 여러 개 보기를 선호한다. 판단도 빨라져서 처음 시작하고 1~2초 사이에 볼지 말지 결정하고 휙 넘긴다. 볼거리는 무한정 나오니까 말이다.

보기가 아니라 읽기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도 오래전부터 말해왔지만, 많은 독서평론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통상적인 오해와 달리 글을 많이 읽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양으로만 본다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접하고 읽는다. 과거라면 책을 꺼내야지만 읽을 수 있었던 활자를 지금은 빽빽한 지하철 안에서도 작은 스마트폰을 꺼내 끊임없이 읽는다. 웹툰처럼 이미지 안에 있는 글자이건, 포털 사이트에 뜬 뉴스이건, 유튜브나 쇼츠에 깔린 자막이건 온종일 활자를 읽는다.

다만 호흡이 긴 글을 읽지 않을 뿐이다. 포털에 올라오는 단타성 기사들처럼 짧은 글을 많이 읽는다. 문제는 이 읽지 않는다는 ‘긴 글’이 그저 길이가 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읽기 관점에서 본다면 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읽기’가 안 된다는 점이 문제다. ‘깊이 읽기’란 눈앞에 적힌 활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활자들 사이, 그리고 그 활자들 너머를 읽는 것이다.

깊이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 너머로 가기 위해 활자 사이로 다이빙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읽을 때 사람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한다. 역지사지 관점에서 그 사람이 돼본다. 등장인물 속으로 다이빙해 타자의 속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자로부터 나오면서 자신을 바라본다. 다이빙한 뒤 물 위로 올라오며 내가 속한 세계를 바깥의 세계로 보는 것처럼 타자로서의 자신을 만난다. 그렇게 나와 동일시된 타자와 타자로서의 나를 만나는 것을 통해, 그 만남의 장소로서 동시대성과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다시, 책으로>를 쓴 매리언 울프는 이런 ‘깊이 읽기’를 인간의 창의성이 발현되는 생성적 순간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눈앞에 펼쳐진 활자나 이미지를 재미있게 소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반추하면서 적혀 있지 않은 것까지 사유하며 자기 자신과 동시대,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앎과 깨달음-비록 그것이 개똥철학이라 하더라도-을 생성해내기 때문이다. 이 순간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이며 생각하는 힘인 “정신의 보이지 않는 현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깊이 읽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깊이 있게 읽기 위해서는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배경 지식에 따라 누군가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것을 누군가는 등장인물이 경험하는 사소한 해프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짜증 낼 수도 있다. 읽기는 누적적인 것이다. 누적된 것이 없으면 읽기는 고통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읽기란 누적된 것을 바탕으로 유추하고 추론하며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동시에 타인의 관점으로 옮겨가는 모순적인 것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텍스트 너머 활자들 사이로 다이빙

그러니 함축적 이야기를 읽는 것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을 유발한다. 더구나 긴 이야기는 끊임없이 읽는 것에서 오는 쾌감을 유예해야 한다. 읽기란 쾌감을 즐기면서 동시에 그 즐거움의 정점을 다음으로 유예하는 과정이며 그 유예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다음 화에 계속’(to be continued)이 주는 아쉬움을 설렘으로 바꿀 수 있어야 ‘긴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바로 이 점에서 연재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를 끊고 다음 화로 넘기는가 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음’을 생각하는 사람, 기다림이 설레는 사람만이 ‘긴 이야기’를 읽는다.

뇌에서 일어나는 정신 작용에 대한 이해는 왜 사람들이 ‘깊이 읽기’를 점점 회피하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전환을 가져왔다. <도파민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에 따르면, 사람들은 도파민에 ‘중독’될수록 점점 더 유예되는 일체의 쾌락을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즉, 보상으로서 쾌락은 즉각 주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고 지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의미부여를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지연 가치 폄하’라고 부른다.

(물론 미끄러짐이 없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순전히 ‘자연적인’ 뇌 문제만은 아니며 ‘문화적인’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지연되는 것을 통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깊이 있는 읽기가 작품을 넘어 자기 자신을 읽어내며 자신에 대한(어쩌면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진실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가능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뇌의 가소성을 활용해 읽기 회로를 깊이 읽기로 구축한다. 반대로 지연되는 것이 미래에 더 큰 보상을 가져다줄 확률이 떨어지는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역시 뇌의 가소성에 따라 그렇지 않은 읽기 회로가 형성된다.)

이야기 관점에서 보면 ‘차이’와 ‘지연’을 통해 이야기를 끊임없이 뒤로 미끄러지게 하는 서사(narrative)를 사람들은 점차 못 참는다는 것이다. 대신 짧은 순간에 결말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끝맺는 에피소드(episode)를 훨씬 더 선호하게 된다. 에피소드는 내러티브와 달리 이야기의 앞뒤를 오가며 크게 분석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차이와 지연을 통해 ‘미끄러지는 것’이 거의 없이 호흡이 짧고 경쾌하고 직관적이다.

짧고 직관적인 에피소드조차 길게 느낀다

그런데 쇼츠 같은 이야기 형식의 등장과 발달은 이 에피소드조차 길게 느끼게 만들었다. 약 20분 진행되는 에피소드도 길다고 느낀다. 사실 에피소드도 더 쪼개면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그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읽기 역량이 요구되고 그것은 쾌감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에피소드를 넘어 장면 하나 혹은 최대 두세 개로 구성돼 지연되는 것이 거의 없거나 순간적인 더 짧은 ‘이야기’를 사람들은 훨씬 더 선호하게 됐다.

가장 짧은 것은 30초도 되지 않는다. 오랑우탄에게 두리안을 주고 오랑우탄은 그 두리안 냄새를 맡고 질색하고 두리안 위에 접시를 엎어버린다. 손에 묻은 두리안 냄새를 맡고는 질색한다. 그 앞과 뒤에 어떤 장면이 연결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긴 콘텐츠는 비슷한 장면을 병렬해서 길어야 2~3분짜리를 만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허영을 다루는 유명 관광지의 SNS상 표현과 실상을 비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더 심화하는 것이 없고 짧은 장면 몇 개를 나열해서 의미를 산출한다.

이런 콘텐츠의 가장 큰 장점은 분리와 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를 만들어서 유튜브에는 통으로 하나의 에피소드로 올리고 쇼츠나 릴스에는 1분 내외의 장면으로 몇 개씩 나눠 올린다. 그중 하나만 보더라도 재미를 느끼는 데는 큰 차질이 없다. 그 장면을 보고 흥미를 느낀 사람은 다른 장면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면 유튜브로 검색해서 보면 된다. 물론 그 장면들은 ‘심화’라기보다 ‘병렬’에 가깝다. 이를 기막히게 잘하는 것이 개그맨들이 만들어 올리는 콘텐츠다.

여기에 이것을 문화상품이나 미디어라 하지 않고 ‘콘텐츠’라고 부르는 의미가 있다. 콘텐츠는 어떤 내용물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지금 사용되는 콘텐츠라는 말은 철저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물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을 대중과 소통하도록 가공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 콘텐츠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철저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사람이며, 그 소통 양식을 따라가거나 혹은 그 양식을 창출하는 사람이다. 작가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사람이라면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소통 양식을 창조해내야 한다. 양쪽 모두 양산형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의미와 소통 사이, 이야기 앞의 심연

여기에 쇼츠 시대에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있다. 이야기는 의미를 지향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개념을 차용해 말한다면, 의미는 차이 안에서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을 지향하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차이와 지연을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는 서사 구조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산업의 생산물로서 콘텐츠는 지연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보상되는 쾌락을 소비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거나 쉽게 화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동시대의 독자/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 의미를 포기할 수 없는 작가들의 앞에 이 괴물이 입을 쩍 벌린 채 버티고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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