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차 직장인, 8년차 팀장. 두 아이 모두 출산 예정일이 닥칠 때까지 만삭으로 출근했고 출산휴가가 끝나기 무섭게 회사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설악산 등반 팀장 워크숍을 다녀온 건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는 일이다. 아이가 산도를 밀고 내려오기 직전까지는 내 책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사회인으로서 마땅한 책임이라고.
그사이 두 아이를 책임지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것은 돌봄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두 이모님의 손에서 자랐다. 첫 번째 이모님은 서울 천호동에 사시던 중년 여성, 두 번째 이모님은 중국동포(조선족)로 상하이에 장성한 딸이 있다고 했다. 두 분께 나는 ‘갑’이었을까? 아직 말도 잘 못하는 아이들을 맡기고 나오면서 아침마다 이모님들의 안색을 살피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각자 다른 의미의 ‘을’이었을지도 모른다.
직장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과 가정의 재생산 노동 사이에서 나는 전자를 선택했고, 후배들이 결혼과 육아를 걱정할 때면 “나는 내 일을 잘하면 되고 육아는 전문가한테 맡기면 된다”는 지금 생각하면 또 헛웃음이 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겁 없이 아이를 둘이나 낳으면서도, 한 인간을 키워내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사회가 정의한 대로 기업을 위한 노동과 가정에서 돌봄노동 사이의 위계를 나도 모르게 내면화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전문가에게 육아를 맡겼던 나의 안일함은 구멍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점점 더 많은 감정노동을 요구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딘가 부당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안일하지는 않았다. 남자 팀장들과 동일한 강도로 노동하면서도 그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수유실에서 언 손을 녹이며 젖을 짜지 않았던가. 회사 근처로 집을 옮기고 점심시간마다 집에 들러 아이들을 살피며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때 되면 찾아오는 온갖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선생님들께 드려야 하는 다양한 피드백과 준비물, 동네 엄마들과 아이 친구들 사이의 네트워킹….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는지 살피고 걱정하는 마음과, 기업과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노동자의 역할 사이에서 헤매고 불안해하는 나날을 견뎌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그 시기, ‘워킹맘들의 무덤’이라 부르는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퇴사를 결정했다. 두 번째 이모님의 퇴사가 불러온 나비효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답을 낼 수 없었던 상황은, 아이가 오후 12시30분에 하교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기관에서 저녁 7시가 넘도록 맡아주던 아이를, 공교육이 시작되면서 오후 12시30분에 찾아와야 한다는 이 모순. 게다가 운이 정말 좋아서 학교 돌봄 교실에 당첨된다 해도, 오후 5시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아이를 데려가야 한다니. 그렇다면 나머지 돌봄 공백은 가정에서 알아서 채우라는 뜻이 아닌가. 그 긴긴 방학 동안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을 아이의 점심은 또 어쩌지? 그 역시 가정에서 알아서 해야 할 문제이고, 이미 많은 가정에서 온갖 고육지책으로 알아서들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난관 앞에서 결국 기업을 위한 생산노동자에서 가정을 돌보는 돌봄노동자를 선택한 나는,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됐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친정엄마가 가장 속상해하셨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뒷바라지했는데 결국 가정주부가 되다니. 나는 어린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키우면서 다른 가족의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온갖 노동을 책임지는데도 “집에서 놀고 있는” 딸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노동은 그렇게 무가치하고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구형 돌봄’을 만났다. “지방정부가 지역 내 모든 국공립어린이집을 직접 운영하겠다. 보육교직원들을 구에서 직접 고용해 어린이집마다 서로 다른 수당을 상향 평준화하고 특히 보조교사와 청소인력 등을 추가 지원해 교사들이 보육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 만약 이런 정책이 우리 동네에서 시행된다면 어떻겠는가? “초등학교의 공간을 지자체가 제공받아 모든 돌봄 업무를 지자체가 총괄하고, 돌봄 인력 운용과 시설 및 안전관리를 맡아 운영”하겠다고 한다면?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중구형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2019년부터 서울시 중구에서 실제 이뤄졌던 정책들이다.
서울시 중구는 대표적 상업지구로 주거환경과 교육 조건이 열악해 매년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정부가 ‘보육의 공공성 강화를 통한 인구 유입’이라는 정책 목표를 세웠다. 중구청은 산하기관인 시설관리공단 내에 ‘사회서비스단’을 신설하고 복지·돌봄·보육 등 사업 특성에 따른 전문인력을 배치해 어린이집과 초등돌봄 교실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진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중구의 양육자들은 학교가 문을 닫아도 구 직영 돌봄교실이 저녁 8시까지 아이들을 안전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주는 기적을 경험했다. 한 명의 아이가 남아 있더라도 행복하게 돌봄을 받는 것을 확인한 이들 사이에 “이 제도만이 경력 단절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여론이 만들어지면서 중구로 이사 오는 맞벌이 가정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2022년 지방선거로 단체장이 바뀌자, 신임 구청장은 중구형 공공돌봄의 중단을 선언한다. 인수위 시점에 이미 사회서비스단 사업을 대부분 민간에 위탁하는 것으로 정책 방향이 틀어져 있었다. 구청 공무원들이 돌봄교사들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하자, 몇 개 어린이집과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양육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구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온라인 단체대화방을 열어 구의원들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모든 일이 처음이고 서로가 낯선 우리였지만 어느새 대화방에는 200명 넘게 모였다.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토론회에서 우리는 서로의 슬프고 불안한 얼굴들을 만났다. 각자도생과 독박육아로 고립됐던 중구의 양육자들이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돌봄노동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공공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자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몇 개월간의 지난한 싸움 끝에 중구청장은 중구 직영 돌봄(폐지)의 잠정적 유예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구 직영 어린이집은 정부의 유치원·어린이집 통합 시행 전까지, 초등돌봄 교실은 교육부의 늘봄학교 확대 시행 전까지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서사원)의 ‘든든어린이집’ 위수탁 종료를 압박하는 서울시의회와 서울시의 모습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보아온 중구청의 모습과 유사하다. 2022년 보건복지부 제출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공립어린이집 5582개소 중 4052개소(73%)가 개인이 위탁하고, 지자체 직영으로 운영되는 곳은 고작 89개소(2%), 공공위탁하는 곳은 217개소(4%)다. 중구 시설관리공단과 서사원이 운영하는 어린이집들은 이 4% 안에 사이좋게 들어간 셈인데, 단체장이 교체되자 이마저도 흔들어대며 민간위탁을 종용했다. 심지어 서사원 든든어린이집 관할 구청 6곳이 모두 서울시에 위수탁 계약기간을 지켜달라 요청했음에도 서울시는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서울시의회는 서사원의 ‘수익성 강화 방안, 근로자들의 임금 삭감’을 골자로 한 운영구조 개편안을 요구하며 출연금을 대폭 삭감했다. 수익성이라는 단어가 돌봄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영리 공급자의 과도한 수익 추구, 종사자의 처우 악화, 서비스 품질 저하, 이용자 인권 침해로 연결되고 마는 민간위탁의 폐해는 어느새 우리 모두의 상식이 됐다. 그럼에도 ‘비용’과 ‘효율성’이라는 칼춤 앞에서 공적 돌봄의 가치는 여전히 무력하기 짝이 없다.
공공이 돌봄노동자를 직접 고용해 안정적 노동환경을 만들고 정당한 임금체계를 지원해 사회서비스의 질을 높이려 시도했던 서사원과 중구형 돌봄은 함께 위기 앞에 서 있다. 위기의 본질은 같다. 시장과 자본의 논리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알아서 굴러가는 가정 내 돌봄으로, 아니면 싸게 후려칠 수 있는 저임금 노동으로 하면 될 일을 왜 굳이 공공이 나서서 제대로 하려고 하냐는 것 아닌가? 그러나 늘 그렇게 후려쳐서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현실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소멸하는 나라, 지속 불가능한 대한민국이다.
중구의 양육자들은 서사원의 든든어린이집 양육자들과 연대하고 있다. 현재 중구에서는 양육자들이 주도하는 ‘서울특별시 중구 아동돌봄 통합지원 주민조례’ 발안 운동이 진행 중이다. 우리는 모두 가정 돌봄노동자다. 각자의 방에 고립됐던 우리는 서로 연결됨으로써 내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교육학적 명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모두의 아이들을 함께 잘 키우기 위해 돌봄의 시장화를 거부하고 공적 돌봄 확대를 주장하자. 사회서비스 고도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사회서비스의 산업화와 시장화에 맞서 지속 가능한 돌봄을 위해 전국의 양육자들이여 연대하라.
장선희 가정 돌봄노동자·서울시 중구 공공돌봄 비상대책위원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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