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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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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배에게는 좋은 직장을

30일 넘게 노숙투쟁 하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안형준씨…

무노조가 무용지물 경영이념임을 삼성만 깨달으면 될 일
등록 2014-06-28 11:53 수정 2020-05-03 04:27
안형준씨는 처음엔 그저 하청업체 사장의 몰상식한 행동을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까면 깔수록 뒤에는 삼성이 버티고 있었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제공

안형준씨는 처음엔 그저 하청업체 사장의 몰상식한 행동을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까면 깔수록 뒤에는 삼성이 버티고 있었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제공

높은 건물이 즐비해서 하늘을 가려버린 서울 강남 땅. 전국이 천국이 돼버린 김밥집 가격도 다른 지역보다 비싸고, 삼삼오오 수다 떨며 지나가는 직장인 손에 쥐어진 타국의 커피 브랜드가 낯설지 않은 동네. 사람보다 건물이, 건물보다 그 위세가 높아져버린 강남 한복판 삼성의 심장 앞에 살림을 차린 사람들이 있다. 바람 한 점, 사람의 향기마저 건물의 포효 앞에 지워진 곳에서 발냄새, 땀냄새 물씬 풍기며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 바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다. 30일 넘게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을 하는 노동자들 속에서 영등포센터 기사 47살 안형준씨를 만났다.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알게 된 공통점

아이 셋과 사랑스런 부인, 다복한 삶을 일구고 있는 안형준씨는 30일째 강남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집 문 닫는 소리조차 신경 써야 한다는 고3 딸이 있지만, 안형준씨는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해 걱정이 많다. 지난 15년은 휴가 한번 못 가고, 날마다 퇴근시간이 늦어 아이들 얼굴 보는 것조차 사치이던 날들이었다. 살림이라도 넉넉했으면 좋으련만 조합원들을 탄압하기 위한 사 쪽의 일감 줄이기로 제대로 일하지 못한 날이 길었다. 지난달 월급은 59만원. 아이 셋을 둔 집에서 59만원은 게 눈 감추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부인이 벌어 좀 낫다며, 지방에서 올라온 다른 조합원들이 걱정이라고 한다. 자신보다는 동료들, 그리고 젊은 후배들 걱정이 더 컸다. 노동조합을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마음 때문이었다.

안형준씨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 첫 직장을 그만두고, 그나마 비슷한 기술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겠다 싶어 삼성전자서비스에 입사했다. 그 세월이 15년. 15년을 근무하면서 쉰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열심히 일했지만 삼성은 노동자에게 그리 넉넉한 인심을 주는 곳이 아니었다. 성수기에 모은 돈으로 아등바등 비수기를 살아야 했고, 12시간이 넘는 하루 일과는 그를 지치게 했다. 기반을 잡은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초라한 자신이 위축되기도 했던 그였다. 그때마다 이직을 생각했다. 회사는 ‘조금 지나면 좋아질 거다’ ‘6개월만 참아달라’ 이야기했다. 그렇게 15년을 참았다. 하지만 그를 버티게 한 건 회사의 사탕발림이 아니라, 먹통이 됐던 냉장고·세탁기·텔레비전 등 그가 만지는 가전제품이 새 숨을 쉬는 것을 보는 보람이었다.

고객을 만나서 수리하고 응대하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회사는 늘 고객만족 정도를 체크했다.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 순으로. 만족도 체크에서 만족만 나와도 회사가 뒤집어졌다. 중간에 업무를 중단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사유서를 쓰라 하고, 업무가 끝난 뒤에도 벌칙성 대책회의를 했다. 하청 사장은 늘 그것을 감시하고, 기사들을 괴롭혔다. 사장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술자리 하소연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비스 기사들의 밴드(모바일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보니,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전국의 동료들을 만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에 망설임도 있었지만 20살 차이 나는 막내 후배에게 좋은 직장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일감 줄이기, 표적 감사, 조합원 폭행 사건. 하나하나 사 쪽의 행동에 대응하다보니 고소·고발을 당했다. 누굴 욕하려는 게 아니었고,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는데 세상은 그들 편이 아니었다.

싸움이 친숙해지다

안형준씨는 처음에는 삼성을 싸움의 상대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저 하청 사장의 몰상식한 행동을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까면 깔수록 뒤에 삼성이 버티고 있었다. 농성을 위해 가방을 꾸려 집을 나올 때 부인은 ‘삼성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느냐’며 걱정했다. 이미 언론과 사회에서 삼성을 상대로 싸워온 이들의 고통스런 삶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노조 경영’이라는 이념이 만들어놓은 공포였으리라. 상상력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 했던가. 이미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의 공포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그도 두려웠다. 30대 한창의 동료들이 과로사로,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것을 보고, 같이 집회 현장에 있던 동료들이 구속당하는 것을 보고.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삼성의 건재함을 보고. 하지만 공포보다 뜨겁게 그를 달군 건 좋은 일터에 대한 열망과,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동료들의 마음이었다. 이제는 ‘집에 가자’라는 말에서, 원래 그의 집이 아닌 삼성 본관의 스티로폼 위가 떠오르는 건, 삼성과의 싸움이 두렵지 않고 친숙해진 이유에서일 것이다.

노조 활동을 하기 전,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업의 경영 스타일이라 생각했다. 그저 부당한 이익을 당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참았다. 그렇게 15년을 억누르고 억눌렀던 마음의 틈새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비집고 나왔다. 그래서 한 선택은, 가족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하는 길이고, 경찰에게 24시간 감시당하고 사회에서 손가락질받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다시는 권리를 요구할 수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포기할 수 없다. 이제 그에게 ‘무노조’라는 것은 기업의 경영 스타일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나락으로 내모는 없어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불빛이 별보다 반짝인다 한들

그는 3대 세습을 잘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이재용이 삼성의 총수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라는 것을 안다. 삼성을 일군 노동자를 외면하고선 세계 일류기업이 되지 못한다는 걸, 삼성의 경영진보다 거리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안형준씨는 다시 볼트를 조이고 가전제품을 수리하고 싶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은 공구세트를 다시 점검하고 충전해서 고객을 만나고 싶다. 15년 가전제품 수리로 길든 손이 더 무뎌지지 않게 정든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 누군가에게서 정든 일터를 빼앗고, 삶의 보람을 빼앗고,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빼앗는 것. 그것이 무노조라면 이제는 없어져야 하지 않겠나. 삼성 빌딩의 불빛이 별보다 반짝인다 한들, 그 빌딩을 쌓아올린 노동자의 삶을 모른 척한다면 그것이 어찌 인간의 기업이겠는가. 무노조 76년. 위엄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도 강남 본관에서 7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은 불빛을 친구 삼아 잠을 청한다. 이제는 무노조가 무용지물 경영이념임을 삼성만 깨달으면 될 일이다.

안은정 삼성노동인권지킴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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