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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 학살 목격자 “지금도 한국군이 한 일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퐁니·퐁녓 학살 목격한 미군 하딩과 헤럴드, 다큐 <사도> 인터뷰서 “주민들 시신을 목격했다”
등록 2024-01-05 19:46 수정 2024-01-11 15:19
퐁니·퐁녓 학살이 발생한 1968년 2월12일 미 연락병으로 현장에 있었던 스티븐 하딩(사진)씨가 통역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송대일씨 제공

퐁니·퐁녓 학살이 발생한 1968년 2월12일 미 연락병으로 현장에 있었던 스티븐 하딩(사진)씨가 통역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송대일씨 제공


2024년 1월19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한 항소심 첫 변론기일이 열린다. 1심에서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승소했으나 대한민국의 항소로 법정 공방을 다시 시작했다. 1968년 2월12일 퐁니·퐁녓 마을에서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 1대대 1중대가 주민 74명을 학살한 것이 맞는지, 그것이 국가배상이 필요한 불법행위인지를 재차 다툰다.

2024년 공개를 앞둔 독립다큐멘터리 <사도>는 퐁니·퐁녓 학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미국 연락병 스티븐 하딩과 켄 헤럴드를 2023년 미국에서 만나 인터뷰한 장면을 수록했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퐁니·퐁녓 마을에서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를 목격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증언을 <한겨레21>이 요약해 싣는다.

“영원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광경이었다”

퐁니·퐁녓 학살은 100건 이상으로 추산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중 여러 증거 기록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건이다. 부상자를 치료하러 현장에 간 미군 본(Vaughn) 상병이 희생자들 사진을 찍어 증거를 남겼고, 미 국무부와 주월미군사령부도 조사 기록을 보고서로 남겼다. 이는 2000년 <한겨레21>의 단독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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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도 많았다. 당시 1중대 1소대장 최영언 중위를 시작으로 2소대장 이상우씨와 3소대장 김기동씨, 헌병대 수사계장 성백우씨, 1중대2소대원 류진성씨 등이 줄줄이 <한겨레21>에 그날의 학살을 증언했다. 그 결과 응우옌티탄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1심 국가배상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

하딩과 헤럴드도 한국군 지원 연락병으로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그들의 증언도 주월미군사령부 감찰 보고서(1968년 2월20일)에 담겼다. <사도> 제작팀은 수소문 끝에 미국 현지에서 그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마을에서 주민들 시신을 목격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먼저 하딩의 말이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적을 소탕 중이었고 저 멀리 마을이 하나 있었어요. 우리는 어떤 논 앞에 멈춰 섰습니다. 총소리가 들렸지만 총격전 같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을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정말 고요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을에는 한국 해병대가 있었고 연못 같은 물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니 여기저기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큐팀이 제시한 본 상병의 사진 속 모습을 하딩은 기억하고 있었다. “연못 근처에서 젊은 여자의 가슴이…. 네, 당신이 보여준 사진이요. (그리고) 물속에 아기가 있었는데 입에서 거품이 조금 나오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잡초에 뒤덮인 채 누워 있었고요. 영원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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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딩이 언급한 사진 속 여성은 가슴이 잘렸고 끝내 숨진, 국가배상 소송 원고와 동명이인 희생자인 응우옌티탄이다.

“지금도 한국군이 한 일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딩이 덧붙였다.

하딩이 다큐팀에 제공한 증언은 그의 주월 감찰 보고서 진술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한국군이 1번 국도 인근 북서쪽 방향에서 저격을 받은 뒤 인근 마을을 소탕했다는 내용이다. 마을 안에서 주민들에게 공격받았다는 내용은 없다. 하딩이 언급한 ‘얼굴이 물 속에 잠긴 어린 아이’와 ‘쌀 포대로 덮인 시신’도 보고서에 등장한다. 하딩은 사건 직후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누구와도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해병대 연락장교 전화를 받았다고도 진술했다.

퐁니·퐁녓 학살이 발생한 1968년 2월12일 미 연락병으로 현장에 있었던 켄 헤럴드(사진)씨가 당시를 떠올리다 잠시 말을 멈춘 모습. 송대일씨 제공

퐁니·퐁녓 학살이 발생한 1968년 2월12일 미 연락병으로 현장에 있었던 켄 헤럴드(사진)씨가 당시를 떠올리다 잠시 말을 멈춘 모습. 송대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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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의 흔적도, 총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큐 제작팀은 하딩에게 ‘이 사건이 민간인 학살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하딩이 답했다. “저는 적군이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못 봤습니다. 저도 적군이 학살을 저질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전 적군의 흔적을 보지 못했고 교전으로 이만큼의 사상자를 낼 만한 총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또는 ‘아니요’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 사상자를 낼 만큼 적과 교전이 있었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다고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전쟁시 지켜야 할 인도적 대우 원칙을 담은 ‘제네바협약’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민간인이나 부상병, 포로 등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만약 하딩의 증언대로 군대와 군대가 대등하게 교전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국군의 마을 공격은 전쟁범죄가 될 수 있다. 하딩이 언급한 희생자도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켄 헤럴드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그는 한국군이 퐁니·퐁녓 마을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우리(연합군)가 그때 총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중대장의 반격 명령을 직접 들었다는 얘기냐’는 다큐 제작팀의 물음에 헤럴드는 “그렇다”고 답했다. 다음은 그의 기억이다.

“그때 김 중대장이 마을로 총을 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모두 죽였습니다. 소, 양, 개를 포함해 다 죽였습니다. 마을에서 수많은 시체를 봤습니다. 정말 엄청난 수였습니다. 한국군이 마을에 총을 쏘기 시작했을 땐 정말 끔찍했습니다. 지옥 같았어요. 이 전쟁 자체가 비극이었죠.”

헤럴드는 한국군의 공격이 정당방위였다고도 주장했다.

“저는 정당방위였다고 생각합니다 . 적에게 총을 겨누는 게 전쟁입니다. 중대장은 적을 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민간인을 쏘려 한 게 아닙니다. 그의 중대와 부하들을 지키려고 한 겁니다. 끔찍한 일이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더 많은 아군이 총에 맞았을 겁니다. 전 이것을 학살로 규정짓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전투였고 아군이 마을을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린 그것을 ‘소탕’(sweep)이라 불렀고 우린 마을을 소탕했습니다. 우리가 맡은 임무를 한 게 다였습니다.”

민간인 학살이 정당방위가 되려면 마을 주민들이 한국군을 공격한 정황이 있어야 한다. 헤럴드는 정당방위 주장의 근거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주월 감찰 보고서를 봐도 ‘전술 대형으로 논을 지날 때'와 (마을을 빠져나와) ‘묘지로 이동할 때' 저격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마을 안에서 주민들에게 공격받았다는 증언은 없다. 

민간인 살상이 전쟁이라고 허용될까

마을 근처에서 적의 총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 전부를 잠재적 적으로 간주해 사살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난다. 1977년 제네바협약에 추가된 제1의정서 제50조는 민간인인지 의심스러운 사람도 적대행위자가 아닌 한 민간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규정한다. 게다가 퐁니·퐁녓 마을은 남베트남군과 미군이 보호하기로 한 발포제한구역이었다. 

응우옌티탄의 국가배상 소송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전쟁 중이어도 적대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거나 참여한 것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는 상태에서 적대행위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없다”고 2023년 2월 판단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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