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누리+ 질긴 20년

등록 2023-12-23 18:48 수정 2023-12-28 13:32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12월은 빨간 달이다. 빨간색 장식의 크리스마스트리도 있지만, 빨간색 에이즈 리본도 있다. 12월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질긴 목숨이라 쉽게 안 죽어요.”

2023년 12월15일, 서울 충무로 ‘공간 채비’에서 윤가브리엘이 말했다. 막 상영된 다큐멘터리 <경계를 넘어>를 찍던 때인 15년 전, 가브리엘은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는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했다는 것을 실감할 만큼 말랐다”고 돌이켰다. 2008년 사진에서 그는 서울 삼성동 로슈 한국지사 앞에 드러누워 있었다. 당시 로슈가 만든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을 먹어야 사는 그였지만, 로슈는 한국이 정한 약품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푸제온을 한국에 시판하지 않고 있었다. 그 투쟁은 의약품 접근성을 막는 다국적 자본에 대한 직접 투쟁으로 역사에 남았다. 의약품 강제실시 청구, 감염인 인권 문제 등 끝없이 싸우며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는 끈질기게 20년을 이어왔다. 이날은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계속 다니면서 바꾸려고요”

2003년 겨울, 서울 남영동의 후미진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나누리+를 시작하는 모임이었다. 활동에 함께하진 못했지만 이따금 기사를 썼다. 어느새 20주년이다. 나누리+의 20년은 한국 에이즈운동의 역사였고, 윤가브리엘의 생존기였으며, 함께한 활동가들의 성장사였다. 그렇게 20년을 함께한 이들이 오랜만에 모였다. 그사이 감염인을 부르는 이름도 피엘(PL)로 바뀌었다. PL은 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요즘은 (하루에) 한 알만 먹어도 되고 정말 좋죠? 예전엔 여러 알 먹고 배탈도 나고 그랬어요.”

가브리엘과 함께 <경계를 넘어> 다큐에 등장해 차별을 알린 이가 말했다. 지방에서 일하다 이날 국립의료원에 진료받으러 왔다는 그는 “오늘 채혈할 때 장갑을 끼더라고요. 항의했죠”라고 말했다. 굳이 낄 필요 없는 장갑을 낀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을 바꾸려는 노력은 오늘도 계속된다. “전에도 여러 번 항의했거든요. 다른 병원에 가라고 전원서를 써주던데 계속 국립의료원에 다니면서 바꾸려고요.”

다들 나누리+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했다. 연구활동가는 나누리+ 덕분에 공부하게 됐고, 피엘은 나누리+ 덕분에 모임을 만들 힘을 얻었다. 근황을 나누던 중, 젊은 활동가가 “나누리가 만들어질 때 초등학생이었다”고 하자 웃음이 터졌다. 머리가 희끗한 활동가는 “에이즈 의약품 강제실시 같은 과연 될까 싶은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 보면 누군가 그 운동을 이어가더라”라고 말했다. 서보경 활동가의 <휘말린 날들>과 윤가브리엘의 <하늘을 듣는다> 교차 북토크도 있었다. 서 활동가는 에이즈운동에 ‘휘말린 이들’의 자긍심을 이야기했고, 음악을 좋아하는 가브리엘은 박성연의 <바람이 부네요>를 추천했다.

살아야 할,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

“바람이 부네요/ 춥진 않은가요…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 세상엔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가브리엘의 말대로 박성연의 목소리는 읊조리듯 힘겹게 노래한다. 세상을 떠난 재즈가수는 그래도 살아갈 이유를 노래한다. 12월을 앞둔 10월 헌법재판소는 여전히 피엘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19조’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아직은 나누리+가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박성연의 노래는 당부한다. “처음 태어난 이 별에서/ 사는 우리 손잡아요”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