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이 피고인(박진성)에게 선고한 형은 너무 가벼워서 부당하다. 피고인을 징역 1년8월에 처한다.” 성범죄 무고 사건 피해자인 자신을 사회적 감옥에서 풀어달라고 호소하던 ‘78년생 박진성’이 2023년 11월8일 대전지법 제4형사부 판결로 물리적 감옥에 수감됐다. 2015년 당시 청소년인 김현진씨에게 언어성폭력을 저지르고, 1년 뒤 이를 공론화한 현진씨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가 1심에 이어 2심도 유죄로 판결 난 것이다.
방청석에서 박씨가 끌려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일어서던 그때, 재판부가 현진씨를 불러세웠다. 정보통신망법 위반을 다룬 이 재판에서 피해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재판부를 보며, ‘98년생 김현진’이 지난 7년여 동안 걸어야 했던 길을 되짚었다.
2013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성폭력 피해 말하기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는데, 현진씨도 2016년 10월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했다. 2016년 9월 박씨의 <한겨레> 기고문(‘나의 여성혐오를 고발합니다’)을 본 뒤 ‘#문단_내_성폭력’ 피해 고발의 일환으로 박씨에게 당한 언어성폭력을 트위터(현재 엑스)에 게시한 것이다. 현진씨의 첫 고발에는 가해자 이름이 특정되지 않았지만, 박씨는 고발 대상이 본인이라고 확신한 뒤 현진씨를 회유하려 했다.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인 중견 시인의 회유는 당시 18살 현진씨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에 현진씨는 가해자를 특정했다. 그러자 박씨가 기고문에서 스스로 밝힌 수법(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며 강제로 성관계) 등과 관련한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자신이 ‘가짜 미투’의 피해자라며 고발자들을 공격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일부 수사 결과를 무기로 언론사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벌였다. 소송 과정에서 고발 내용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언론사들이 소송을 빨리 포기하며 모든 고발이 허위인 것처럼 규정됐다. 박씨는 ‘성범죄 무고 피해자’ ‘허위 미투 피해자’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특히 박씨는 2018년 서지현 당시 검사의 ‘미투’ 이후 사회 전방위로 전개된 성폭력 고발 운동에 대한 반동(백래시)에 기생해 유무형의 이익을 얻었다. 박가분·이선옥·김용민·오세라비 등이 박씨 사례를 방송·출판 등에 이용하며 ‘안티 페미’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일명 ‘곰탕집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 무고 척결을 내세운 모임인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당당위)도 박씨 사례를 활용해 여성혐오 정서를 강화했고, 이를 정계 진출 기회로 삼았다.
보배드림, 웃긴대학, 클리앙, 에펨코리아, 딴지 등 ‘남초’(남성이 많은) 커뮤니티의 열광적 지지도 박씨가 기세등등하게 된 배경이었다. 2019년 3월 박씨가 ‘변호사 자문을 얻었다’는 핑계를 대며 현진씨의 주민등록증 등 개인정보를 트위터에 게시하며 허위 사실을 유포했을 때도,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현진씨에 대한 언어성폭력을 저지르며 박씨를 옹호했다. 그때 현진씨 나이 겨우 스물하나였다.
박씨는 ‘자살 협박’을 성관계를 강요할 때만 이용한 게 아니다. 2020년 현진씨 등 여러 피해자와의 소송이 한창일 때, 박씨는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긴 뒤 잠적했다. 조국 전 교수, 강남순 교수, 허지웅 작가 등 유명인이 그의 안부를 물으며 ‘성범죄 무고의 희생자’로 재규정해줬다. 현진씨는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추가 가해에 시달렸다.
박씨는 2019년 현진씨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했다. 취약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먼저 제기해 피해자의 말을 막고 이후 조정 등의 과정으로 사건을 무마하는 것은 가해자들의 공통 전략 중 하나다. 박씨는 이번에도 현진씨가 대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진씨는 싸우기로 결정했고, 그의 곁에는 연대자들이 있었다. 현진씨는 민사에 대한 반소,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도 진행했다. 그제야 박씨는 피해자 변호사에게 쌍방 소 취하를 권하거나, 민사소송 결과를 언론에 알리지 말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그러나 현진씨는 모든 과정을 공개하며 적극적으로 방청연대를 요청했고, 결과를 알렸다.
기소 뒤에도 공소사실을 부인하던 박씨는 재판 흐름상 유죄 인정의 기미가 보이자 1심 결심에 이르러서야 변호인 의견서 등을 통해 혐의를 인정했다. 동시에 본인이 걸었던 민사소송의 항소를 취하하고 해당 금전을 공탁하며 반성한다고 읍소했다. 1심 재판부가 이를 반영해 집행유예를 선고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전략은 유효해보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며 민사항소 포기나 금전 공탁을 형사공탁처럼 호도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박씨는 각종 ‘꼼수 감형자료’(성폭력예방교육과정 이수, ‘선플달기’ 운동 참여 등 부당감형자료)를 제출하고 피해자 쪽의 비협조로 합의에 실패했다며 선고 직전 형사공탁(기습공탁)을 하는 방식으로 선처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현진씨는 변호사와 논의해 민형사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사자 신문, 피해자 의견진술 제도 등을 활용해 활자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법관 앞에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 피해자 목소리를 전달하려 애썼다. 법원은 이에 공명했고, 특히 형사 항소부는 피해자 목소리를 경청하며 이를 결과에 반영했다. 1심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반영했던 양형 사유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1심의 양형이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전 과정은 그 자체로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 일이었다. 형사상 합의의 전제는 피해자의 용서이며, 피고인의 반성을 가늠하는 척도는 부당 감형자료 등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함을 지적한 점 등은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를 조각조각 내서 마음대로 말하던 사람들은 침묵하는 현실.” 2023년 11월17일 현진씨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의 일부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말, 시간, 자리를 앗아간다. 그의 말은 이제 시작이지만,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이들은 귀를 막고 침묵 중이다. 박씨를 적극 옹호하며 피해자와 연대자, 페미니스트를 공격하던 이들이 이번 재판 결과를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박씨에게 선의를 악용당한 ‘피해자’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박진성의 공범들’에게 말한다. 반성하고 사과하라. 당신들의 가해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들이 끝까지 추적해 수많은 ‘김현진들’의 말, 시간,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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