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가을이었다. 보증금 대출을 받아 이사하려는데 자꾸 문제가 생겼다. 은행을 옮겨보기도 하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 가서 상담도 받았다. 조금이나마 더 안정적인 주거 방식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감행한 이사였는데, 대출이란 과정이 이토록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함이 몇 달간 식구 모두를 피 말리게 할 줄은 몰랐다. 금융시스템이야말로 절차와 규범이 잔인하리만치 분명한 줄 알았는데, 은행마다 담당 직원마다 판단과 대응이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수월하지 않은 대출 과정은 나와 동거인들에게 삶의 방식을 의심하게 했다. 시민단체에서 일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어서, 신혼부부가 아니어서, 모아둔 돈이 적어서 대출이 어려운 것일까 하고. 현 집주인과 한동안 연락이 안 됐을 때는 온갖 상상을 하며 내용증명을 써서 보냈다. 전세사기 급증으로 심사가 더 까다로워지고 오래 걸린다는 얘기를 들으며 구조의 빈틈을 파고드는 사기꾼들을 저주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견디는 동안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쓴 <세계 끝의 버섯>(현실문화 펴냄)을 읽었다. BIYN에서 주최한 기본소득 세미나의 첫 번째 책이었다. ‘송이버섯’을 따라 세계 곳곳의 자본주의 내·외부를 여행하다보면, 기본소득운동을 만들어갈 새로운 인식과 감각을 얻으리라 기대하며 고른 책이다. 왜 기본소득 세미나에서 이 책을 읽는지 의아했던 사람들도 책거리로 버섯전골을 먹자는 제안에 솔깃해하며 합류했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북유럽의 송이 숲을 오가는 이야기는 여러 기억을 불러왔다. 버섯 있는 땅의 “들썩거림”을 얘기하는 부분에선 이끼로 가득한 스웨덴의 어두운 숲에서 버섯을 딴 경험이 떠올랐다. 일행과 멀어질 때마다 문득문득 두려웠지만 마침내 버섯을 발견했을 때의 충만한 기쁨이란.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발파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연대방문 했던 11년 전도 생각났다. 인간이 만든 것에만 감동하며 살아오던 무감한 나에게 강정의 숲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다종의 세계”를 향한 강렬한 호기심을 촉발했다.
한편 “진보 서사의 단순화에서 해방”되자는 제안에는 내가 속한 운동과 조직에 여전히 단일한 성장 서사만을 대입해 생각해온 일을 돌아봤다. 책에서 말하는 대로 ‘오염’이 다양성을 만든다면, 내가 두려워했던 마주침이 무엇이었고 지키려 한 순수성은 무엇이었는지, 원칙을 저버리는 것과 오염이 어떻게 다른지도 고민하게 됐다.
그런데 대출을 받으며 겪은 일들 때문인지 무엇보다 ‘불확정성’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걸렸다.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또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체계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라면?”(51쪽) 정상성 규범 밖 안전망을 짓기 어렵다는 작은 실감에도 이렇게 번민하는데, 저자가 제안하는 모호성 탐구는 얼마나 힘들까.
저자는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경작”하는 송이버섯과 소나무, 그리고 인간의 이야기를 정성껏 들려준다. 마냥 죽이고 망치는 것만이 아닌 인간의 역할, 즉 “사랑의 노동”으로서 인간의 ‘교란’ 행위가 품은 가능성은 버섯이 우연히 발견되는 숲처럼 통제받지 않은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자유를 추구하려면 계속 헤매야 한다.
세미나 마지막 날, 한 분이 진짜 송이버섯을 가져왔다. 친구에게 요즘 읽는 책을 소개했더니, 마침 갖고 있던 경북 영덕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채집한 송이버섯을 준 거라며. 덕분에 돌아가며 송이버섯 냄새를 맡았다. 책을 읽는 동안 상상만 했던 깊은 가을의 송이 냄새는 예상을 비껴갔고, 그 사실이 반가웠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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