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표지이야기 ‘장애인 인권 판결’ 관련 취재를 할 때였습니다. 한 판결문에 나오는 당사자를 찾기 위해 연락을 돌리고 있는데, 어느 시민단체 팀장의 문자가 왔습니다. “권익옹호 담당 ○○○입니다. 전동휠체어 관련 소송에 대해 문의하셨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중년 남성 이름, 팀장 직함, 사무적 말투. 저는 당연히 비장애인을 상상하며 ‘통화 가능하시냐’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런 답이 왔습니다. “언어장애가 있어 (통화) 소통이 약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 고정관념은 ‘팀장’이란 직함과 ‘장애인’을 잘 연결하지 못했던 겁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습니다. 변호사이자 교수인 취재원을 회의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관례대로 상대방에게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그분도 자기 명함을 줬는데요, 뒤늦게 그분에게 시각장애가 있는 것을 깨닫고 귀가 빨개졌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또 있군요. 한번은 청각장애가 있는 작가에게 기고 부탁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로 어떻게 소통하라고.
장애인 인권 ‘걸림돌’ 판결들을 보면서, 법원에 악의가 있다고 생각진 않았습니다. 다만 ‘이해의 폭이 나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법원은 저보다 나아야 할 것 같아서요. 법원은 대학병원이 청각장애인에게 인터넷이 아닌 전화로만 진료 예약하라고 한 것을 ‘재량’이라고 봤습니다. 입 모양을 봐야 소통하는 청각장애인(구화인)이 공무원시험 장애인전형 면접위원에게 투명마스크 착용을 부탁했는데(당시는 코로나19 시기) 거절당한 것이 차별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무엇보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폭행으로 사망한 중증장애인이 있었는데, 법원은 ‘손해배상책임 범위’에 당사자의 일실수입(생존했다면 벌 수 있는 수입)을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최근엔 장애 관련 유튜버도 많고 먹방·브이로그로도 돈을 버는데 장애인은 생존시 벌 수 있는 수입이 없다고 본 겁니다.
지난 기획기사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AI(인공지능) 판사 도입이 시급하다’는 댓글이었습니다. 댓글을 보니 갑자기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습니다. AI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인간보다 업무 효율이 훨씬 높아진다면? 인간인 기자가 AI 기자에 비해 허를 찌르는 질문도 못하고, 자료 분석도 못하고, 심지어 글도 더 못 쓴다면? 그래서 기자는 물론이고 회사원·작가·판사 등도, 그 잘난 AI가 일실수입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일실수입을 인정받지 못한 중증장애인의 기분을, 좀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될까요.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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