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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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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피해자의 희생을 최후의 희생이 되게 하려면

재난의 반복에 갇힌 사회에서 살기 위해 트라우마를 잊은 사람들, 그 너머로 가는 ‘동료’ 시민의 존재
등록 2023-11-03 09:12 수정 2023-11-06 17:02
2023년 10월28일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즈음해 서울시청 앞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향을 피우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2023년 10월28일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즈음해 서울시청 앞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향을 피우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이태원 참사 추모 행사를 정부가 방치해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했다고 제기한 헌법소원이 헌법재판소에서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시민은 “서울광장 인근을 통행할 때 영정 사진을 보고 싶지 않더라도 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부당하다”며 소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를 정부가 제지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음으로써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단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정당하고 다행한 일이다. 다수의 시민에게 이태원 참사는 참사 전후 행정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희생된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소원의 제기 자체가 인륜에 반하는 일이며 세월호 참사부터 반복해 나타나는 동시대의 반인륜적 징표로 여겨질 수도 있다.

‘쾌적하게’ 산다는 것을 곱씹어본다

그러나 저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람의 목적과 마음이 어떤지와는 달리 주변 몇몇 사람에게서 참사와 관련된 말이나 글, 행사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는 일이 꽤 있었다. 누구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괴로워서 그렇다고 했고, 누구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국가 수준에서 공식적으로 추모해야 하는 일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소원을 제기한 사람의 말처럼 내가 ‘쾌적하게’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쾌적하게’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이 말에는 아마 ‘내 감정을 건드리지 않아 동요되지 않고 불편하지 않게 하는’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감정이 건드려지고 불편한 이유는 사건에 대한 정치적 입장(즉, 이는 사적 사건이지 결코 공식적 사건이 아니다) 때문일 수도 있고, 사건이 몰고 온 정치적 파장(즉, 내가 지지하는 정파의 유불리에 대한 판단)에 대한 입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저 영정 사진이 떠올리기 싫은 장면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일 수도 있다.

사실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한국 시민은 완전히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조건과 전혀 쾌적하게 살아갈 수 없는 조건 둘 다를 가졌다. 한국 근대화를 흔히 ‘압축적 근대화’라고 말한다. 서구가 200년에 걸쳐 이룩한 근대화를 50년 만에 해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말은 비서구 국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양쪽 모두에서 압축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한 것을 지칭한다.

동시에 압축적 근대화는 서구가 200년 동안 겪은 온갖 문제와 재난, 그리고 참사를 50년 동안 압축적으로 겪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전쟁부터 시민혁명, 쿠데타와 정치적 혼란, 학교폭력부터 산업재해까지, 그리고 부실 공사 등으로 인한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 같은 참사부터 행정권력·관료제의 단점만이 치명적으로 드러난 세월호·이태원 참사까지 온갖 참사와 재난을 압축적으로 겪었다는 말이다. 한 인간의 삶으로 말하면 보통 한 사람이 생애에 한 번 겪을 일을 한국 시민은 10년에 한두 번씩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저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한다면 괴로움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을 유지할 수가 없다. 기억의 지배를 받으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시공간에 갇혀버린다. 학교폭력 희생자에게 ‘졸업’은 불가능하고, 사회적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에게는 애도의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발생한 ‘과거’가 현재로 영원회귀하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사회엔 트라우마가 반복되지만 사람들에겐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역설이 벌어진다. 사회 전체적으로 트라우마가 반복되지만 사람들에게는 트라우마가 ‘없다’. ‘없다’에 따옴표를 치는 이유는 정말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없는 듯이 살고 있으며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트라우마적 사건이 반복되는 것만큼이나 트라우마를 깨우는 말과 행동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같은 것 말이다.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사건은 망각하거나 마치 망각한 것처럼 외면하면 된다. 마치 그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듯이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반복적으로 내 앞에 나타나서 이것이 반복되는 사건임을 상기시킨다. 핵심은 ‘반복’에 있다. 같은 재난이 반복된다는 것. 그 재난으로부터 이 사회가 한 걸음도 못 나간다는 것. 그거야말로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는 끔찍한 절망이다. 개별적 사건의 크기보다도 말이다.

말의 힘은 재난이 반복된다는 것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인 듯’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 말의 힘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봤자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사건을 겪은 몸은 못 견디고 정신은 절망에 빠진다.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일 말이다. 반복되고 벗어날 수 없기에 이 재난에 의한 희생은 발터 베냐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버린 시대의 최후 희생도 아니고, 새로 도래한 시대의 최초 희생도 아니다. 최초와 최후가 없는 그저 무한 반복되는 절대적 절망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망각하는 것이다.

반복에 갇힌 자만큼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아무리 시시포스에게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고 저항적 가치를 부여하더라도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는 비참한 존재이지 비극적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삶에는 ‘건너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반복에서 단절해 건너편으로 넘어감이 불가능하기에 말할 필요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비극적 주인공에게서는 몸의 고통을 넘어서는 그의 ‘말’을 보지만 비참한 존재에게서는 고통받는 몸만 보게 된다. (물론 베냐민에 따르면 비극적 영웅은 침묵이라는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다. 시시포스의 침묵은 올림포스를 고발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다.)

반복에 갇힌 몸은 “이것은 반복”이란 말을 억압하고 외면하려 한다. 이것이 반복임을 누구보다 몸이 잘 알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 반복된다는 것을 학생의 몸보다 더 잘 아는 게 있을까. 산업재해가 반복되며 언제 나를 덮쳐올지 모른다는 것을 현장에 출근하는 육체노동자보다 더 불길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따라서 반복이 운명이라고 느끼는 한, 몸은 말에 의해 깨어나는 몸이 아니라 괴롭혀지는 몸이 된다. 그러니 그 몸이 말을 거부하고 억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말해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역사성 없는 ‘실시간’과 다른 ‘지금 여기’

그러니 사회가 트라우마적이 될수록 사람들은 트라우마가 없는 듯이 살아간다. 그게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없는 인물. 이 인물에겐 시간이 역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응시할 과거의 상처가 없기에 건너갈 미래도 없다. 과거와 미래와 ‘역사’로 엮이지 못하고 끊임없는 실시간으로만 존재하는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이는 겉보기에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 같지만 사실은 역사의 진공상태로서 실시간일 뿐이다.

‘지금 여기’는 주체적 충실성에 의한 시간 의식이다. 나를 과거의 속박과 헛된 미래의 기대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무엇이 주어졌고, 무엇을 선용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고도의 주체적 시간 의식이 ‘지금 여기’다. 반대로 실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에 과잉돼 대응하는 수동적 시간 의식이다. ‘실시간 속보’라는 말처럼 아무리 발 빠르게 대응해봤자 언제나 늦은 대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시간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은 충만하지만 실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피곤하다. 능동적으로 보이는 것이 수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노예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시간으로 계속 업데이트되는 것에 대응하느라 피곤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실시간은 언제나 긴박하게 적군과 아군이 대결을 펼치는 전장이기도 하다. 전투는 아드레날린이 극도로 분비되는 희열과 쾌락의 시공간이다. 전투야말로 실시간적이고 실시간이야말로 전투적이다. ‘지금 여기’의 시간 의식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실상을 보도록 촉구하며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지만, 실시간은 지금 벌어지는 전투에만 집중해 승리를 요구함으로써 전쟁을 지속시킨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트라우마가 사람을 사건이 일어난 전투가 벌어진 과거라는 시공간에 가둔다면, 트라우마가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삶은 전장으로서의 실시간에 갇힌다. 하나는 반복되는 것을 자각하며 과거에 갇히고, 하나는 반복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실시간에 갇힌다. 둘 다 모두 이 반복에서의 단절에 대한 요구는 없다. 파국의 단절로서 역사는 없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반복되는 운명만이 있을 뿐이다. “운명은 죽음을 향해 굴러간다.”

비극적 이야기가 되게 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영웅이 아닌 희생자의 이야기가 비참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극적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주체’가 필요하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적 주인공들은 침묵을 통해 변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올림포스를 고발하고, 주인공에 대한 혐의를 바로 그 혐의를 찾으려는 심판관 쪽으로 돌렸다. 그들은 스스로 죄를 지었다. 헤겔의 말처럼 “죄를 지었다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인물의 명예”이기 때문이다.

참사 희생자들은 죄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무고하다.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와는 반대로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 시민들이 죄를 지어야 한다. 다른 시민의 ‘쾌적함’을 일깨우는 죄 말이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 없이. 그러나 동료 시민의 쾌적함을 방해하는 ‘행동으로서의 죄’가 아니라 이 파국과 단절하겠다는 역사에 대한 ‘의지로 인한 죄’를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혹은 희생자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료 시민‘들’이. 시민사회의 영웅이란 단절의 꿈으로 그들의 희생을 최후의 희생이 되게 하려는 ‘동료’가 되는 시민 아니겠는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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