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부는 환절기, 이맘때 가장 큰 숙제는 온 가족이 독감백신을 맞는 것이다. 예방접종은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약화한 물질을 우리 몸에 주입해 면역체계가 그 질병에 맞설 수 있게 훈련하는 것이다. 백신을 맞은 사람은 병원체가 몸속에 들어오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항체가 빠르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거나 가볍게 앓는다. 또한 백신으로 많은 사람이 특정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되면 그 질병은 전파되기 어려워져 사회 전체가 집단면역을 이룰 수 있다. 큰 고민 없이 백신을 맞으며 이런 백신의 원리와 이점을 누려왔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온 국민이 ‘백신잘알’이 되면서 백신이 이전과는 달리 보인다.
코로나19 공포를 끝내줄 백신이 하루빨리 개발되기 바랐는데, 백신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등장했다. 팬데믹 초기 <뉴욕타임스>의 백신 트래커(추적 시스템)를 통해 유명한 제약사들이 백신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기대하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기까지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20년 말 화이자와 모더나를 시작으로 여러 제약사가 백신을 내놓았다.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각국 정부는 백신 개발에 이전에 없던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임상시험과 제품 심사 절차를 수정해 개발 시기를 앞당겼다. 물론 과학계에 그간 쌓여온 바이러스와 백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중요했지만, 실험실 수준의 연구 결과에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고 대량생산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단 개발되고 생산된 백신을 세계 곳곳에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백신 개발 초기에는 각국이 백신 물량을 확보하려 경쟁했다. 코로나19 백신 공급에서 소외된 국가와 사람들을 위해 국제적으로 백신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코백스 퍼실리티’가 설립됐지만, 어떤 국가가 자국민이 여러 번 맞을 수 있는 백신을 확보하는 동안 다른 국가의 접종은 지연됐다.
한 지역에서 생산한 백신을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떠올려보라. 화이자 백신은 영하 70도에서 보관, 운반해야 한다. 모더나 백신은 운반 차량이 고립되자, 폐기 시간을 넘기기 전에 같이 고립된 차량의 운전자들에게 나눠 주사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이 맞을 백신 물량을 초저온 상태로 운송할 수 있는 항공시스템, 물류센터, 트럭, 보관 용기와 냉장고 등이 필요했고 그것을 운용할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각지에서 백신을 제대로 관리하고 접종할 수 있는 의료기관과 의료진도 있어야 했다.
코로나19 백신을 처음 접종하면서 새로운 의약품의 이동 경로와 까다로운 관리 절차를 체감할 수 있었다. 각 백신의 물량에 따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백신의 종류와 접종일이 달라졌고, 병원이 아닌 위탁의료기관에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 나는 지역 구민체육센터를 찾아 임시로 꾸려진 예진실과 접종실을 거치며 화이자에서 개발하고 어느 공장에서 위탁 생산된, 정부가 사들이고 콜드체인으로 이송돼, 훈련된 의사의 손에 들린 백신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접종부터는 간단한 예약으로 동네 의원에서 맞았으니, 코로나19 백신을 각지에 보내는 물류의 연쇄가 그만큼 안정화된 것이다.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들에게 수여됐다. 당연히 과학의 성취를 소리 높여 축하할 만하지만, 새로운 과학지식과 원리가 백신을 백신으로 만드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사회라는 몸의 곳곳에 백신이 제때 당도하도록 그 흐름을 원활히 하는, 지극히 물질적인 배치와 실천이 필요하다.
장하원 과학기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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