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한때는 모두 아이였어요. 여러분의 엄마 아빠도요. 서로 다른 집에서 태어나,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며 자랐죠. 미래에 대한 각자의 꿈을 꾸면서요. 우연히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여러분을 낳았어요. ‘부모 연습’을 해본 적도 없이 말이에요. 그러니 ‘평화로운 가족’ ‘의젓한 부모님’이란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너무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새로운 가족의 규칙을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음식 간을 맞추는 사소한 일부터, ‘어디에 살 것인가’ 같은 큰 문제를 정하는 일까지, 가족의 일은 사사건건 말다툼이 되기 쉬워요.
여러분은 어쩌면 실컷 싸우던 엄마 아빠가 뒤를 돌아보며 이런 말을 하는 걸 본 적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너는 엄마 편이야, 아빠 편이야?”
표현은 조금씩 달라도 비슷한 질문이 많아요. 가볍게는 “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부터, 심각하게는 “엄마가 잘못했어, 아빠가 잘못했어?”까지. 부모님 표정이 정말 험악해졌을 때는 “넌 엄마랑 살 거야, 아빠랑 살 거야?”란 질문을 받아본 친구도 있을 거예요.
<나는 이혼가정의 자녀입니다>(류에스더 지음, 마음세상 펴냄)란 책, 혹시 본 적 있나요? 작가가 8살 때쯤의 일이었대요. 이불을 덮고 자다가, 눈을 감은 채 엄마와 이모의 대화를 듣게 됐어요.
“쟤는 꼭 그런 것까지 지 아빠 닮아가지고! 어쩌면 그렇게 생긴 것도 똑같고 먹는 것이든 식성까지도 똑같은지 몰라!”(엄마의 말)
당시 작가는 미세하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의 움직임이 몸으로 느껴졌다고 해요. 작가는 이렇게 고백해요. “그냥 아빠를 닮은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가슴이 벌렁거리며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큰 고민 없이 ‘그냥’ 한 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러분도 부모님의 사이가 나쁜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큰 상처를 받았겠죠.
<한겨레21>과 인터뷰한 윤은미(46·가명)씨도 비슷한 아픔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대요. 부모님 사이가 굉장히 나빴고 결국 헤어졌는데, 부모님은 서로에 대한 비난을, 어린 은미씨와 오빠에게 계속 들려줬다고 해요. ‘엄마(아빠)는 이런 행동을 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다’’ 같은 말이요.
“엄마랑 같이 있을 땐 아빠 욕을, 아빠랑 같이 있을 땐 엄마 욕을 들으면서 제 안에 굉장한 혼란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부모한테 충성심을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게 ‘부모따돌림’(한 부모가 자녀에게 다른 부모와의 관계를 끊게 할 목적으로 계속하는 행동)임을 알았어요. 엄마 아빠는 아이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깎아내리는 말을 계속하셨어요. 본인들이 굉장히 힘든 시기라 자식의 고통까지 보지 못하셨던 거죠.”
많은 친구가 부모님 싸움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생각한대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에요.
“어릴 때지만 불안했던 기억이 장면, 장면으로 남아 있어요. 엄마가 우는 모습, 아빠가 옷을 던지는 모습, 엄마가 뛰어나가는 모습, 학교 갔다 오니 엄마 짐이 모두 사라진 날, 갑자기 떠나버린 엄마, 아빠의 담배 연기로 뿌옇게 가득 찼던 방. 제일 힘들었던 건, 나 자신이 ‘소중하지 않다’는 생각과의 싸움이었어요. ‘나는 별 볼 일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엄마가 아빠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얘기했고 아빠도 엄마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얘기했는데, 그 형편없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나도 얼마나 형편없겠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윤은미씨)
김화영(50·가명)씨도 초등학생 시절 ‘부모따돌림’을 겪었는데, 돌아보니 ‘어른들도 잘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던 거 같대요.
“꼭 이혼가정이 아니더라도 많은 집에서 부모가 서로에 대한 험담을 하잖아요. 아이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고요. 어른은 아이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잘 몰라요. 저도 어릴 때 엄마가 아빠를 항상 무능하게 얘기하셔서, 엄마의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곤 했어요. 커서 보니 아빠의 실제 모습보다 제가 훨씬 더 아빠를 무능하게 생각했더라고요. 모든 남자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됐고요.”
2022년 우리나라에서 이혼은 9만3천 건 정도였어요. 미성년 자녀가 있는 부부의 이혼은 그중 41.7%(3만9천여 건)였대요. 모든 이혼가정에서 ‘부모따돌림’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부모님 싸움을 아이가 모르는 경우는 드물대요. 꼭 이혼하지 않는 부부도 많이들 말다툼하니, 그 과정에서 눈치를 보거나 고민한 친구도 많을 거예요.
윤은미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같은 고통을 겪는 친구들에게 이런 얘길 들려주고 싶다고 해요.
“너희는 부모님의 관계를 통해서 태어난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더 고귀한 존재란다. 너희의 존재는 부모의 태도나 말로 결정지어지는 게 아니야. 어릴 땐 나도 엄마 아빠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지. 그런데 세상에 나와보니 좋은 사람이 아주 많이 있었어. 앞으로 너희가 만나게 될 어른은 좋은 사람도 있을 거야. 거기에 정말 기대를 걸어봐도 좋아.”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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