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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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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 같은 한국법 그래서 사랑한다”한 이유

‘약물 이용 성범죄’ 느는데도
국가 대응에는 구멍이 숭숭
등록 2023-04-07 13:25 수정 2023-04-12 00:21
픽사베이

픽사베이

“전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한 기억이 없어요.”

2021년 지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 ㄱ의 말이다. “고민이 있다”며 불러낸 지인이 건넨 술 한 잔을 마신 후 피해자는 기억이 끊겼다. 정신을 차렸을 땐 숙박업소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였다. ㄱ은 비정상적으로 끊긴 본인의 기억 등을 토대로 약물에 의한 성범죄를 의심해 다음날 해바라기센터를 찾아가 검사한 후 지인을 고소했다. 그러나 지인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숙박업소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ㄱ이 자신의 발로 걸어서 가해자와 방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혔고, 검사 결과 약물도 검출되지 않았다. 준강간 등으로 고소했던 피해자는 불기소처분과 함께 ‘무고’ 혐의 피의자로 경찰서에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무고 피소 후 만난 ㄱ은 2018년 ‘클럽 버닝썬’ 사태 이후 수사기관이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오히려 남성 지인과 단둘이 술을 마신 사실을 비난받는 상황에 처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강간약물’ 대처 경찰 매뉴얼 바꾼 지 4년 지났는데

2019년 경찰청은 ‘성폭력 근절 업무 매뉴얼’을 개정하면서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준강간, 준강제추행으로 접근하던 것에서 벗어나 약물 투약 자체를 ‘폭행’으로 규정해 강간 혐의를 적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준강간 등 혐의를 적용하면 약물 투약 같은 범죄행위보다는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에 수사 초점이 맞춰지고, 범행에 사용된 약물 파악이 늦어져 범죄 입증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성폭력 목적 약물’(일명 ‘강간약물’)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수사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DFSA: Drug Facilitated Sexual Assault)는 타인의 행동과 인지력을 상실시키기 위해 고의로 약물을 먹인 뒤 성폭력을 저지르는 범죄행위를 말한다. 2021년 국회입법조사처가 낸 ‘외국의 데이트강간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 규제와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유엔(UN)을 비롯해 미국·영국 등 주요 국가는 성폭력 목적 약물을 ‘데이트강간 약물’로 별도 지정해 특별 관리하고 있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는 최대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게 강력한 처벌 규정을 두고, 범죄 통계 분석·예방·관리 등 총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해 적용한다. 하지만 한국은 ‘자가 복용’을 중심으로 마약 관련 범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타인에게 약물을 투약하는 방식의 성범죄에 대해선 실태 파악은커녕 이를 가중처벌할 수 있는 규정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2019년 서울의 유명 클럽 ‘버닝썬’에서 손님을 모으려고 여성에게 약물(GHB)을 투약하고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은 2019년 2월14일 클럽 앞에서 대기 중인 취재진의 모습. 연합뉴스

2019년 서울의 유명 클럽 ‘버닝썬’에서 손님을 모으려고 여성에게 약물(GHB)을 투약하고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은 2019년 2월14일 클럽 앞에서 대기 중인 취재진의 모습. 연합뉴스

성범죄에 악용되는 약물은 필로폰 등 전통적인 마약 외에도 이른바 ‘물뽕’이라 불리는 감마하이드록시낙산(GHB), 케타민, 엑스터시(MDMA), 합성대마, 러시 등의 신종 마약과 졸피뎀, 프로포폴 등 향정신성의약품까지 포함된다. 특히 ‘GHB’는 무색무취의 약물로 체내에 들어갈 경우 금방 분해돼 단시간 내 검출하지 않으면 증거가 남지 않아 일명 ‘퐁당’으로 불리는 약물 이용 성범죄 등에 적극 활용된다. 경찰청은 2019년 ‘마약류 등 약물 이용 의심 성범죄 수사지침’에서 “주변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거나 질문에 또렷이 대답하다 잠이 들며, 깨어난 이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주변 사람들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종속적인 모습이 나타난다”고 GHB의 특성을 설명했다.

GHB는 증거 찾기도 어려워

하지만 1998년 한국에서 GHB가 처음 발각된 뒤 25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GHB의 원료인 GBL을 이용해 성범죄를 저질렀던 30대 남성 약사의 사례 외에 GHB 검출을 토대로 한 성범죄 인정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2018년 ‘클럽 버닝썬’ 사태 때도 남성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이 약물을 이용하는 것을 사실상 묵인하거나 심지어 판매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GHB를 활용해 여성을 성폭행하고 해당 장면을 촬영한 뒤 이를 상품으로 내걸어 고객을 유치하는 사건 등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법은 무디다. 성매매 알선 등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지난 2월 만기출소한 그룹 빅뱅의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33)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법을 희화화하며 “×× 같은 한국법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권유 혹은 타의로 마약을 접한 여성의 수는 늘고 있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약물에 의한 성범죄 의뢰 사건’은 2017년 1274건에서 2021년 2538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이만희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2021년 연평균 마약류 2차 범죄는 217건(4년간 총 869건)으로, 이 중 강간 81건, 강제추행 42건에 이른다.

특히 여성은 대부분 타인의 권유로 마약을 시작했다. 2019년 ‘한국 여성의 마약류 경험에 관한 연구’(유상희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에서 마약사범 중 검찰의 ‘교육이수조건부 기소유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여성 가운데 타의로 마약을 시작한 경우가 12.5%였다. 자의로 시작한 이들 중 ‘권유’에 의한 경우는 67%, 술과 커피 등 음료에 몰래 들어간 마약을 복용한 경우도 5.8%였다. 약물 이용 성범죄는 단순히 일회성 성폭력 범죄에 악용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약물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약물에 중독된 피해자는 이를 빌미로 협박하는 이들에게 성착취·성폭력 피해를 추가로 입거나, 마약 운반책 등의 착취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이제 더는 마약이 투약한 개인에게만 향하는 범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타인이 몰래 먹인 마약으로 중독에 이르는 경우도

ㄱ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결국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여전히 2021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입가에 맴돌던 미세한 짠맛(*별표 설명 아래)을 기억하던 그는 1차 성범죄로도 고통스럽지만 약물 이용 성범죄 피해자를 대하는 수사기관의 무능과 2차 가해, 그리고 입법적 공백으로 인한 추가 피해가 더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피해자의 날아간 기억을 채우는 것은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해체된 일상으로 인한 고통이다. 약물 이용 성범죄 실태 파악부터 관련 매뉴얼 및 법규 정비, 피해자 지원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때다. 10대 때부터 쉽게 각종 약물을 접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마약청정국’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GHB는 ‘무색무취’로 유명하지만, 약간의 짠맛이나 비누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술이나 음료를 마시며 의심이 든다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 소변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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