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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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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는 새싹 아기의 인큐베이터

집 귀퉁이에 모인 플라스틱 더미가 빛을 발하는 모종 키우기, 버리는 쓰레기 다시 보고 위대한 쓰레기 호더가 되자
등록 2023-03-03 05:49 수정 2023-03-11 08:59
다양한 플라스틱 포장재에서 키우는 모종들.

다양한 플라스틱 포장재에서 키우는 모종들.

한파가 몰아친 2023년 1월은 너무 춥고 지루했다. 진짜 농민들의 일상은 사시사철 바쁘게 돌아간다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빌린 맨땅뿐인 반농인은 다르다. 심심함에 몸부림치다 하는 일이라고는 묵은 씨앗은 정리하고 올해 키울 씨앗은 골라 재정비하고 올해의 새 농사계획을 세우는 것 정도. 하지만 2월부터는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전에는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농민들이 파종을 시작하면 전전긍긍하며 씨앗을 넣었지만 이제는 내 밭의 ‘속도’를 안다. 1월은 너무 이르다. 3월 말이나 4월 초에 주말농장이 개장하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물을 쓸 수 있는데 서향집에서 키우는 모종은 실내에 오래 머무는 만큼 웃자라 꼬부라진다. 땅으로 옮겨심으며 실내에서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해 얇디얇아진 줄기가 싹둑 잘리는 것을 방지하려면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밀려와도 참아야 하느니라.

2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솜파종을 시작한다. 물에 적신 휴지나 솜 위에 씨앗을 올려둬 불리면서 촉을 틔우는 방식인데, 조금 귀찮긴 해도 실내 파종에선 꼭 촉을 틔워 넣는 것이 성공률을 높인다. 화분도 써보고 모종판도 써보다 넘쳐나는 쓰레기에 스트레스를 받아 선택한 것이 얇은 생분해 부직포로 감싼 친환경 펠릿형 화분. 개당 가격이 150원 이상이라 정말 비싸지만 직경 33㎜라 좁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가 한정적인 실내에서 최대한 많은 모종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화원에 가면 당장 심을 수 있게 준비된 튼실한 모종을 많이 팔지만 굳이 이 고생을 하는 이유는 화원에는 향이 좋은 토종 오이나 쇠뿔가지, 폼폼 모양의 마리골드 모종이 없다. 그리고 새싹을 키우는 과정은 얼마나 경이롭고 귀엽고 뿌듯하면서 중독적인지!

그리고 이 시기 가장 빛나는 것은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 몇 년 전 딸기를 담고 크루아상을 담았던 플라스틱 포장 상자는 그 뒤로 몇 년 동안 우리 집에서 수많은 새싹 아기를 인큐베이터처럼 안전하고 촉촉하게 품어냈다. 완전히 떡잎이 나오고 본잎이 나오기 시작할 때 새싹 아기는 플라스틱 인큐베이터에서 독립할 수 있는데, 독립 뒤 뚜껑이 없는 플라스틱 접시로 옮겨진다.

시중에는 일관된 규격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든 새싹 인큐베이터를 팔지만 딸기상자보다 기능적이지 않고 쓰다보면 이것도 결국 쓰레기가 되거늘. 그러니 플라스틱을 또 살 필요는 없다. 남편은 늘 집 귀퉁이에 쌓인 플라스틱 더미를 볼 때마다 나를 ‘호더’(쓸데없는 물건을 축적하는 사람)라고 놀렸다. 이미 쌓아둔 플라스틱이 많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는 전부 모종판으로 보여 다시 쌓인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쓰레기는 1년에 한 번, 이 시기에 빛을 발한다.

참으로 극성맞은 쓰레기 타령이지만 파종 단계에서 쓰레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2021년 ‘재단법인 숲과 나눔’의 시민아이디어 지원사업 ‘풀씨’에서 ‘지구로 온 씨앗’팀은 플라스틱 대체 육묘용기를 실험했다. 한 농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흙을 단단하게 뭉쳐 그대로 싹을 틔우게 하는 ‘소일블록’과 휴지 심의 아랫부분을 접거나 신문지를 돌돌 말아 포트를 만들고 우유갑 등에 심는 실험을 했다. 그들의 실험을 따라 하며 어디에선가 농민이 이런 실험을 한다는 사실이 정말 반가웠다.

3월부터 주말농장 언덕에 수없이 쌓일 수많은 쓰레기 걱정에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우리 제발 버리는 쓰레기도 다시 보고 다시 쓰는 위대한 쓰레기 호더가 되자고요!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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