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의 농사는 4월에 시작한다. 부지런한 농사꾼은 지난가을 수확을 마치고 곧바로 밭 설거지를 깔끔하게 하고 거름까지 펴두었다. 제아무리 부지런해도 기온을 올릴 수는 없는 일. 땅이 녹고 밤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을 때를 기다려야 파종할 수 있다.
간혹 내가 쓴 ‘농사꾼들’을 읽고 무슨 가을에 감자를 캐냐, 감자는 여름에 나기 때문에 하지감자라 한다거나, 옥수수가 한창 클 땐데 왜 이제야 씨앗을 심느냐, 소설 쓰지 말라는 댓글을 다는 분들이 있다. 여러분, 해발 500m 강원도 산중은 겨울이 6개월이고 봄은 4월부터랍니다. 우리나라가 생각보다 넓어서 지역마다 기후 조건이 아주 다양해요.
프로 농부는 이 시기에 하우스에서 모종을 내기도 하고 가축을 기르는 집은 계절과 상관없이 바쁘지만, 주말 농사꾼인 우리는 여전히 농한기를 지내고 있다. 겨울 동안 농막에 이상이 없나 살펴보러 한 번 다녀온 게 전부다. ‘농사꾼들’의 글감을 짜내려 애쓰고 있는데 언니가 전화했다. “너 예전에 진부장날 시장 봐와서 밥 먹는데 행복했다고 했던 거, 그거 좀 써봐.”
이야기는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막 시작돼 모두가 패닉 상태였던 봄. 나는 오십견이 와서 오른쪽 팔을 쓸 수 없었다. 왜인지 불면증도 생겨 밤을 생으로 지새우며 휴대전화로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줄곧 읽었다. 어느 지역에 확진자가 나왔네, 그 사람 동선이 어디네 하는 뉴스에 와글와글 떠드는 댓글들까지 읽으며 심란한 마음을 더욱 활활 태우던 새벽엔 어깨가 더 많이 쑤셔왔다. 그해 봄 여러 여건이 맞아 농사를 처음 시작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감자를 심어놓고 3주쯤 지나니 싹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감자가 (풀도 같이) 자라고 있다니! 자는 동안에도 돈이 벌리는 구조를 만들어놔야 부자가 된다는데, 감자야말로 자고 있어도 놀고 있어도 땅속에서 쑥쑥 자라네. 재미가 붙고 신이 났다.
매 주말 밭을 살피러 갔다. 사실 조그마한 감자밭은 파종까지가 힘들지, 이후 수확할 때까지 별로 할 일이 없다. 풀 좀 뽑고 푸성귀를 따서 챙기고는 밭이 내려다보이는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으면 믿을 수 없이 고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저 멀리엔 가리왕산 자락이, 바로 앞엔 두타산이 둘러쳐 있고 파란 하늘엔 목이 긴 하얀 새가 유유히 날아간다. 거리두기 해야 할 사람도 없어 마스크도 필요 없다. 맑은 공기를 필터 없이 마음껏 마시다가 바이러스도 불면증도 잊고 스르르 낮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이 왔다. 당시엔 마을 분이 임대용으로 지어둔 집을 얻어 지냈는데, 토요일 점심쯤 밭을 한번 둘러보고 집에서 빈둥대다가 하룻밤 자고 돌아가는 식이었다. 어느 주말, 마침 진부장날이라 장 구경을 갔다. 진부오일장은 부치기(부침개의 방언) 장수나 옷·농기구 장수 등 장돌뱅이들과 직접 기른 곡식과 채소를 가지고 나온 동네 할머니들이 어우러진 아담한 시장이다. 채소가 싱싱하고 값싸 욕심내 이것저것 샀다. 생으로 죽죽 찢어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향기로운 이슬송이버섯과 날치알과 여러 씨앗을 섞어 만든 씨앗젓갈도 한 통 샀다.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양은 밥상도 하나 샀다.
점심때가 지난 오후, 집에 돌아와 마당이 내다보이는 마루 끝에 밥상을 펴고 앉았다. 밖엔 해가 쨍쨍한데 앉아 있는 그늘은 시원하다. 남편과 함께 장에서 사온 씨앗젓갈에 밥을 비벼 내가 기른 상추에 쌈을 싸먹었다. 두 명이 아작아작 씹는 소리만 들린다. 소주도 한 잔 따라 쭉 들이켰다. 아, 이걸로 충분하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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