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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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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픈 그때 너도 아팠구나

학력·직업·지위가 다른 남녀노소 10여 명이 자신의 생애사 들려주는 ‘공감대화’
10년 해보니, 장기화한 집단적 혐오 감정도 넘을 수 없는 벽 아니라고 느껴져
등록 2022-10-16 16:57 수정 2022-10-17 10:10
2012년 처음 공감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정병호 교수(왼쪽)와 참가자들.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제공

2012년 처음 공감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정병호 교수(왼쪽)와 참가자들.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제공

혐오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일, 그 시작은 나와 다른 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단절은 혐오를 야기하고, 혐오는 다시 단절을 심화하는 촉진제로 작용한다. 이해의 시작은 대화다. 청소년, 탈북민, 이주여성, 사할린과 중국 동포 등이 대화를 통해 오해와 편견을 넘는 과정을 10년간 지켜봤고 최근 그 결과물을 엮은 공저 <공감대화>를 펴낸 정병호 교수가 혐오의 해법으로서 ‘공감대화’에 대해 쓴 글을 싣는다. _편집자

경계를 넘는 공감능력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오래 단절됐던 남북한 주민들의 만남은 탈북민 입국으로 이미 시작됐다. 사회주의국가에 살던 동포들의 국내 이주와 다민족·다문화 이주민이 급증한 지도 이미 한 세대가 지났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됐지만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동·서독인의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동서포럼’

기존 사회구성원 간의 ‘공감 위기’도 심각하다. 분단과 전쟁 트라우마로 왜곡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남남 갈등이 되고, 지역·이념·세대·성별·계급·장애 등 모든 차이는 차별과 정쟁의 도구가 됐다. 이런 경계를 더욱 심화하는 것은 각 집단에 맞춰 편향된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교류하고 가짜뉴스까지 돌려 보는 폐쇄적 소통 구조는 집단 간 혐오 감정을 퍼뜨리고 갈등을 부추겼다.

2012년 9월, 나는 한국을 방문한 악셀 슈미트 괴델리츠와 함께 탈북민과 남한 주민의 대화 프로그램을 시행해봤다. 그는 동·서독 통일 이후 사람들이 직접 만나 교류하면서 오히려 편견과 오해가 깊어지는 역설적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동서포럼’(Ost-West Forum)이란 대화 모임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 프로그램은 학력·직업·지위가 다른 남녀노소 10여 명이 자신의 ‘생애사’를 함께 이야기하도록 구성하는데 참가자에는 전직 대통령, 기업가, 노동자, 농부뿐 아니라 비밀경찰 출신과 고문 피해자도 있었다.

대화 모임은 우선 위축되는 사람이 없게 평등한 자리가 되도록 했다. 출신·성별·세대 구성부터 균형을 맞추고, 한 사람이 한 시간씩 자기 삶을 이야기한 뒤 질문을 받으며 대화를 나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의 삶을 조용히 반추하는 되새김 시간을 가졌다. 자기 삶을 이야기해준 사람에게 보내는 존중의 표현이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모임 진행을 맡은 나는 참가자들의 변화를 확인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프로그램은 차별당하는 이주민 소수집단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상호이해를 위해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지난 10년간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과 여성평화운동단체 ‘조각보’는 한국에서 50여 차례의 공감대화 모임을 진행했다. 아홉 살 어린이부터 아흔 살 노인까지, 해녀에서 광부까지, 남녀노소 모두 300여 명이 참여했다. 최근 출간된 책 <공감대화>(푸른숲 펴냄)에서 이 10년간의 이야기캠프를 소개했다.

“답답한 것이 뻥 뚫렸어요.” “속이 시원해요.” 이야기캠프를 마친 초등학교 아이들의 소감이다. 부모의 외모와 억양이 조금 다르다고 ‘다문화’라며 따돌림당하던 아이들이 ‘솔직토크’를 하니까 마음이 후련하단다.

“내가 제일 힘들고 제일 상처받은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들도 비슷했다. 남한, 탈북, 다문화 배경 고등학생들이 1박2일 동안 공감대화 방식으로 이야기하며 울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홀가분해하기도 했다. “당연히 내가 제일 힘들고 제일 상처받은 줄 알았는데, 다양한 아이들의 여러 아픔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탈북한 여학생이 말했다. “거기 먹을 거 없어서 왔냐”고 무시당하고, “북한 말 해보라”고 놀림당한 아픔에 마음 졸이며 살았는데 “남한 아이들도 힘들어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오히려 안도했단다. 아버지가 필리핀 여성과 재혼해서 ‘다문화’가 됐다는 남학생은 “서로 참 다르구나 느끼다가 뭔가 본질적으로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며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 한 시간의 삶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참가자들은 이렇게 주의 깊게 듣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은 처음이라고, 따뜻한 느낌으로 들어줘서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면적으로 깊은 만남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모두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애쓰는 모습에 공감했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진행해온 공감대화 모임에는 남한 내 이른바 좌우, 보수-진보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전쟁과 남북 대치 상황 속에 장기화한 집단적 혐오 감정도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님을 확인했다. 처음에 적대적 시선을 보내던 이들도 서로의 삶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겪은 일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었음을 차츰 깨달았다. 자신을 아프게 한 이들도 또 다른 아픔과 슬픔을 경험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념 대립의 희생자이자 그 아픔을 딛고 어떻게든 살아낸 생활인으로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참 애썼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서로, 또 스스로 위로했다.

이야기의 힘, 공감의 힘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줬을 뿐인데 위로도 받고 ‘내 인생이 확장되는 느낌’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야기의 힘, 공감의 힘 때문이다. 충고·조언·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공간에서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고정관념을 떨치고 새로운 눈이 열리는 시간. 그 시간을 함께 누리며 느끼는 해방감. 그렇게 대화모임을 거듭하며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공감대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공감대화가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바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량 확산되는 디지털 혐오에 비해, 더딘 아날로그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다양해진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면 익숙한 편견으로 재빨리 판단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다름’을 포용해야 한다. 결국 변화를 만드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감능력이다. 오늘날 사회 경계를 따라 심화되는 혐오를 넘어 존중으로 가는 도구로 공감대화가 활용되기 바란다.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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