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조율 한번 해주세요

등록 2022-06-13 15:06 수정 2022-06-14 00: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빈곤사회연대 활동을 막 시작하던 어느 날 할머니가 물었다. “너는 일은 하는데 돈은 못 번다며? 무슨 일이 그러냐?” 많이 못 벌 뿐 벌긴 하는데 ‘돈은 못 번다’니. 할머니께 말을 전했을 엄마나 이모들의 염려를 알 수 있었다. 우리 단체가 하는 일을 설명하자 할머니는 “나쁜 구석이 없는 일”이라며 등을 두들겨줬다. 할머니의 응원 덕분에 내 어깨가 좀 펴졌다.

가계약에 성공했지만…

할머니는 “나쁜 구석이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모두 그 마음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실 구하기도 쉽지 않다. 빈곤사회연대는 홈리스행동·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금융피해자연대해오름, 이렇게 네 단체와 함께 서울 용산에 사무실을 꾸렸다. 이 사무실에서 홈리스 야학도 열리고, 함께 밥도 해먹고, 명절이면 차례도 지낸다. 9년 전 구한 지금의 사무실은 오래된 주택이다. 처음엔 스위치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쓸고 닦고 고쳐가며 사용해 제법 정든 공간이 됐다. 작은 마당엔 깻잎과 고추가 자라고, 옆집 지붕에서 내려온 고양이 ‘지붕이’도 산다.

최근 용산에는 속속들이 재개발 구역 지정이 활발하다. 사무실이 있는 골목도 낡은 주택을 헐고 다세대주택이 올라서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골목이 넓어지고 예쁜 가게가 많아지는 건 경험상 세입자에게 늘 불안한 신호였다. 계약 종료 시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주가 재건축할 계획이라고 했다. 계약은 종료됐다.

서울 하늘 아래 설마 우리 갈 곳이 없을까 싶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나빴다. 9년간 꾸준히 오른 임차료는 우리가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었고, 곳곳이 재개발을 코앞에 두고 있어 선택지도 적었다. 얼마 전 어렵사리 적당한 곳을 만나 가계약에 성공했다. 기쁜 마음도 잠시, 입금한 단체 이름을 찾아본 건물주는 ‘홈리스’ ‘빈곤’ 같은 단어에 깜짝 놀라 계약을 취소했다. 이런 이야기가 동네에 소문났는지 요즘은 보고 싶은 공간이 있어도 ‘홈리스, 빈곤단체면 안 된다’는 얘기부터 듣는다. 우리가 뭐 어떻단 말인가. 9년간 월세 체납 한 번 없었던 성실한 세입자로서 억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도 가계약을 세 번 파기당했다고 한다. 장애인단체도 자립생활주택부터 사무실 구하기까지 늘 험난하단다.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공기처럼 퍼진 편견은 그렇게 작동한다. 가난한 세입자를 반기는 건물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갈수록 더 나쁜 조건을 수용해야 할 판이니, 취약함이 새로운 취약함을 불러오는 알고리즘이 이런 걸까 싶다.

이렇게 다 쫓겨나는데 잠이 오시나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46일간 단식했던 인권단체 활동가 미류는 10년 전 서울 상도동 철거촌에서 기타를 메고 한영애의 노래 <조율>을 불렀다. 반파된 집들이 가득한 어두운 골목길에 울려퍼지던 미류의 목소리가 나는 늘 절박한 순간이면 떠오른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에게도 노랫말처럼 ‘잠자는 하늘님’의 조율이 필요했다.

사무실을 구하는 험난한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오르는 집값과 반복되는 거절로 보건대 아직도 하늘님의 조율은 닿지 않았다. 땅의 일은 결국 땅의 몫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요즘 같아서는 하늘님이 아니라 마당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이렇게 다 쫓겨나는데 잠이 온다면 이 하늘님도 좀 편파적이지 않나 싶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