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에는 2021년 선고된 민사·행정 분야 판결문을 대상으로 4개월여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변호사 32명이 2021년 1~12월 ‘장애’라는 단어를 언급한 전국 법원의 판결문 240개를 모았다. 그중 판결문 77개를 선별하고(1차 선정) 다시 판결문 16개를 추려냈다(2차 선정). 선정위원들은 세 차례 회의 끝에 디딤돌 판결(5건), 걸림돌 판결(2건), 주목할 만한 판결(7건) 등 모두 14개의 판결을 선정했다. 주목할 만한 판결은 디딤돌 판결보다 그 의미는 덜해도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한 판결이다. 권건보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동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 서동후 변호사, 이주언 변호사, 이호선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외래교수, 정제형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 표경민 변호사 등 장애인 인권 분야 전문가 8명이 머리를 맞댔다. <한겨레21>은 선정된 판결과 그 의미를 정리해 전달한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5월 중에 ‘2022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보고회’를 열 계획이다.
“버스가 두 대 있다면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해서 저 버스(노인장기요양서비스)를 탄 거거든요. 다른 버스(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를 타야 하는데, 얼떨결에 버스를 잘못 탄 것일 뿐인데 왜 갈아타지도 못하게 했는지….”
황신애(58)씨는 뇌병변 장애 1급의 중증장애인인 동시에 다발성 경화증, 하반신 경직 등 노인성 질환도 앓고 있다. 거동이 어려워 홀로 누워 지낸다. 하루 18시간, 20시간 혼자 있을 때면 음식을 줄이고 물을 마시지 않는다. 집 안에서도 휠체어로 5분 걸리는 화장실을 혼자 힘으로는 갈 수 없어서다. 황씨는 방문요양서비스를 받아오다가 2016년 9월 노인장기요양서비스를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로 변경해달라고 신청했다. 일상생활이나 간병을 하루 최대 4시간 지원하는 장기요양서비스와 달리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인의 자립을 목표로 여행이나 취미활동까지 포괄해 하루 최대 14시간 지원한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줘요.”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제5조 제2호)에 따르면, 만 65살 미만의 노인성 질환이 있는 사람이 장기요양서비스를 받으면 활동지원급여를 신청할 수 없게 돼 있다고 했다. 황씨는 시민단체의 조력을 받아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서비스를 바꿔달라 해도 안 바꿔주고 그 담을 너무 높게 가로막아 못 넘어가게 하니까요.”
2020년 12월 헌법재판소는 ‘노인성 질병을 가진 사람을 일률적으로 활동지원급여 신청자에서 배제하는 건 평등원칙에 어긋난다’며 해당 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2021년 4월 광주지법 행정1부(재판장 박현)는 지자체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장애인 당사자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법원 판결로 그는 하루 13~1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매일 밤 기도한다. “뉴스에 장애인 누구 나오면 기도하려고 이름을 적어놔요. 내가 편해져서 혹시 예전의 그 간절한 마음을 놓아버릴까봐서요. 빨리 마땅한 법이 만들어져서 다른 분들도 혜택을 보면 정말 좋겠어요.”
장애인 고용률은 여전히 1%대에 머무른다.(2020년 상시노동자 중 장애인 고용비율 1.48%,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채용되더라도 승진, 전보, 해고까지 노동 전 과정에서 차별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강성운(50)씨는 신장장애 2급의 만성신부전증 환자다. 2013년부터 주 3회 혈액 투석 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2019년 2월 시내버스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한 뒤 노선 교육을 받다가 회사에서 채용 취소 통보를 받았다. “당사는 귀하의 신체적 능력에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회사 쪽 내용증명) 회사는 강씨가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운전 중 경미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까지 회사 편을 들었다. 결국 강씨는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을 냈다.
2021년 1월 서울행정법원은 “채용 거부에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며 강씨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강씨가 혈액 투석 치료를 받아도 운전 업무에 지장이 없고, 오히려 회사는 치료를 위해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등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정기적인 치료로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한 이상 치료 사실을 회사에 알릴 의무도 없다고 봤다. “업무와 무관한 장애로 채용을 꺼리는 고용시장의 오랜 관행을 타파했다.”(권건보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강씨는 2021년 11월 항소심도 승소했다. 2년 반의 싸움 끝에 그는 마침내 회사에 복직했다.
청각·언어 장애인인 ㄱ씨는 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2019년 학교는 ㄱ씨에게 재임용 거부를 통보했다. ㄱ씨는 2017년 변경된 재임용 평가 기준을 제대로 안내받지 못했다며 소청심사를 청구했고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재임용 거부 처분을 취소하라고 결정했다. “수어 통역 등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로 일반인과 같은 방법으로 이메일을 보내 기준 개정 절차를 밟았다. 이는 장애가 있는 ㄱ씨에게 동등하지 않은 수준의 정보를 제공한 간접차별 행위에 해당한다.” 학교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재판장 안종화)는 학교의 청구를 기각했다. ㄱ씨에게 한글 독해 능력이 있다 해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그에게 가장 확실한 의사소통 방법은 수어 통역이다. 앞선 두 차례 임용심사에서 수어통역사를 대동한 것으로 봐선 수어 외의 의사소통 방법만으로는 정확한 의미나 구체적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기에 부족한 것이 명백했다. 이 사정을 알고 있는 학교는 수어 통역 방법으로 해당 사항을 안내하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특히 ㄱ씨가 “장애로 인해 다른 전임교원들과 교류나 소통을 통해 개정 내용을 확인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적극적인 안내가 필요했다고 지적했다.
“농인이라고 해서 의사소통 지원 정도가 다 똑같을 수 없고 결국 개개인의 장애 정도와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서 편의 제공이 돼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표경민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
ㄴ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시가에 살면서 아이를 키웠다. 그러던 중 홀로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ㄴ씨가 아이를 데려오려 할 때마다 시부모와 갈등을 겪었다. 무력충돌도 벌어졌다. 시부모는 ㄴ씨를 상대로 친권 상실과 후견인 지정 심판 청구를 제기했으나 항소심 법원은 어머니 ㄴ씨의 양육권을 그대로 두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아이의 미성년 후견인으로 ㄴ씨 친정어머니를 선임했다. 결국 ㄴ씨는 시부모를 상대로 아이의 인도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시부모는 ㄴ씨에게 지능지수 59의 경도 지적장애가 있기 때문에 아이를 ㄴ씨에게 보내는 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구지법 민사14부(재판장 장민석)는 ㄴ씨 손을 들어줬다. “친권자의 유아인도청구를 함부로 배척할 수는 없다. 특히 유아에 대한 모의 친권 행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성보호의 원칙에 비춰서도 더욱 두텁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 법원은 ㄴ씨의 양육 의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최소한의 경제활동을 수행할 능력과 의지, 양육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주변인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정신감정 결과를 종합해 이런 판단을 내렸다. “장애가 있거나 이주여성 부모의 양육권을 유독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당사자의 양육 의지, 직업, 주변 환경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법은 장애인 앞에 평등한가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43.html
장애를 있는 그대로 고려하라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44.html
구색만 갖춘 차별 금지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45.html
피해자의 장애는 가해자의 면죄부?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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