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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노동을 필수교육하자

등록 2021-05-29 11:28 수정 2021-06-02 02:33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필수노동자’.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1년 넘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새롭게 주목받는 말 중 하나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 아파도 3~4일 집에서 쉴 수 없는 사람들, 다른 시민의 비대면 일상을 위해 몸을 움직이고 대면으로 연결자가 돼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보육교사나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같은 돌봄노동자와 배달종사자, 환경미화원, 콜센터 종사자 등이 대표적이다. 여러 시민사회단체의 절실한 노력과 요구 끝에 2020년 10월과 12월 두 차례 걸쳐 필수노동자 보호, 지원 대책이 발표됐고, 2021년 5월18일에는 ‘필수업무 지정 및 종사자 보호·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의미 있는 진전이다. 자, 법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잘 시행되게만 하면 될까?

재난시에만 필수적인가

이번에 통과된 법은 ‘필수업무’를 “재난이 발생한 경우 국민의 생명, 신체의 보호와 사회기능 유지에 필요한 업무”로 정의하고 있다. 읽자마자 의문이 든다. 재난시에 필수적인 일이, 평상시에 필수적이지 않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재난의 위험도 재난 대책도 평등하지 않았던 코로나19 시기의 여러 장면을 돌이켜보면, 필수노동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조치는 당연히 시급하다.

그러나 필수노동자가 처한 하나같이 열악하고 위험한 사회적 조건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 인정체계, 보상체계가 총체적으로 잘못 짜였다는 사실이다. 필수노동자의 위기는 체제 위기라는 인식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필수노동자 보호’는 문제를 해결하는 듯한 제스처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갱신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일-가정 양립’이 ‘여성 문제’로 여겨지는 한 워라밸은커녕 여성의 과로와 하층계급 여성의 비가시화를 가속하듯, 돌봄이 모든 시민이 아닌 특정 집단(취약계층, 취약노동자)의 문제로 여겨지는 한 정의로운 돌봄사회로의 전환은 요원하다. 감염병을 ‘그들 탓’으로 돌리는 혐오의 회로와, 재난으로 인한 위험과 고통을 ‘그들의 문제’로 한정하는 인식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불현듯 ‘핫이슈’가 된 듯 보이는 ‘돌봄’은, 실은 지금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여성에게만 절실하고 지긋지긋한 문제다. 반세기 전 여성을 가족에 용해시키고 돌봄노동을 전가해온 말 중 하나인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은,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지금 “비혼 딸은 노후 대책”이라는 숨 막히는 말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낫다며 ‘딸바보’ 시대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열불이 나서 왜 아들을 딸처럼 키우지 않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우리 자신과 사회 전체를 다르게 만들기

돌봄에 적합한 성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봄을 여성에게 부착시키는 성별제도가 존재할 뿐이다. 돌봄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성별, 계급, 인종 등에 따라 돌봄의 책임 전가를 정당화해주는 부정의한 체제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먹을 음식도 만들 줄 모르고 함께 사는 사람이 아파도 돌볼 줄 모르는 인간을 ‘독립적’이라고 오인하는 사회, 내 손으로 돌봄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욕망하는 사회에서 돌봄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필수노동자 보호’만이 아니다. 돌봄은 역사상 한 번도 필수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한 한 번도 제대로 평가되고 정의롭게 분배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몸의 취약성과 유한성 속에 살아간다. 필수노동자를 넘어 필수노동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숙고하고 우리 삶과 관계,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를 재구조화하는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모두가 필수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지식, 시민적 책임이기에 누구나 참여해야 하는 일, 헌법적 권리이자 의무로서 정의롭게 분배돼야 할 사회의 기초. 돌봄이 이렇게 이해되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아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일 것이다.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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