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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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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할 거면 차라리 돈으로 주세요

자기 일처럼 여기는 공감의 매개가 없다면 ‘값싼 동정’
등록 2021-05-27 14:37 수정 2021-05-28 00:40
류승연 제공

류승연 제공

2003년이었던가. 회사 선배가 어느 날 “야! 동정할 거면 돈으로 줘. 그 돈으로 내가 술 마시며 알아서 위로할게”라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에도 돈을 밝히더니 어떻게 동정의 마음까지 돈과 연결한다는 말인가. 참 뻔뻔하구나, 상종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얼추 20여 년이 흘렀다. 이제는 나도 안다. 동정할 거면 차라리 돈으로 주라는 말의 의미를, 그 안에 숨겨진 복잡한 마음을. 그래서 나도 외쳐본다. “동정은 사양합니다. 동정할 거면 차라리 돈으로 주세요. 그러면 현실적인 도움이라도 됩니다”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지면 좋은 일?

초장부터 돈 얘기를 꺼낸 건 지난 주말 친정에 갔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부모님으로선 잘 키운 큰딸이 장애 아이를 낳아 고생하며 사는 게 안쓰럽기만 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나와 우리 가족을 동정하는 말에 내가 폭발해버렸다. 그동안 쌓인 설움까지 더해져 코를 팽팽 풀어가며 꺼이꺼이 울었다.

집에 오니 엄마에게 연락이 와 있다. 돈을 보냈다고 한다. 애들 맛있는 거 사주라 한다. 엄마가 돈을 보낸 건 심리적 보상 차원에서였을 것이다. 내 마음에 상처를 준 미안함을 전달할 길이 달리 없었으리라. 다음날이 되자 아빠의 메시지도 와 있다. 아빠도 돈을 보냈다고 한다. 메시지엔 미안하다는 말과 생활비에 보태쓰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흥! 언제 돈 달라 했어요? 이런 돈 없어도 잘 삽니다”라며 부모님 통장으로 돈을 돌려보냈으면 얼마나 멋졌을까? 하지만 현실 속 지질한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동정받을 거면 차라리 돈으로 받는 게 낫다. 그러면 당장 현실적인 도움이라도 된다. 1994년 일본 드라마 <집 없는 아이>의 명대사였다는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세요”가 이렇게 내 삶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이날의 일을 돌이켜보자. 이런 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좋은 일 아니냐는 것. 발달장애 아들과 함께하는 현실에서 많이 맞닥뜨리는 상황 중 하나이기도 하다. 타인을 불쌍히 여기고 도우려는 마음, 다시 말해 사람들이 동정심을 갖는 게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로서도 더 좋지 않냐는 얘기인데….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하다.

상대를 내려다보는 자가 되는 ‘동정’

나도 과거엔 나보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방법을 찾아 돕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때의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마음에 들었다. 이타적인 마음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니…. 후후훗. 역시 나는 착한 사람, 선량한 시민,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구나. 그런 내 모습에 만족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우리 부모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동정으로 표현됐을 뿐이다. 부모님 입장에선 장애 아이 키우며 불쌍하게 사는 딸을 위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했다가 성격 더러운 딸의 폭탄을 맞은 것뿐이다.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정말 성격이 더러워서? 아니다. 내가 그만큼 막장은 아니다. 동정받았지만 공감받지 못해서 그랬다.

사전을 찾아본다. 동정이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게 가엾게 여김’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자기 일처럼’이라는 부분이다. 타인의 힘든 처지를 자기 일처럼 공감한 상태에서 우러난 마음은 그 진정성이 상대에게도 가닿는다. 그럴 때의 동정은 마음까지 함께 전달돼 가슴의 온도마저 올라간다.

그런데 동정하면서 ‘자기 일처럼’이라는 부분이 빠지고 ‘상대를 딱하고 가엾게 여김’만 드러나면 그게 문제가 된다. 내 일처럼 여기고 생각해보는 ‘공감’이 쏙 빠진 채 상대를 딱하고 가엾게만 여기는 순간 나는 상대 위에 우뚝 올라선, 상대를 내려다보는 자가 된다. 딱하고 가여운 상대는 내 아래에 선 자이며 나와는 다른 층에 있는 사람, 다시 말해 구조적으로 내 밑에 자리잡은 나와는 다른(또는 상관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구조화의 틀은 그렇게 순식간에 작동한다.

평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 관계의 구조화가 작동하면 그때부터 관계에서 온갖 왜곡이 일어난다. 무시, 경멸, 혐오, 우월, 자만 등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관계 안에 침투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잽싸게 감지하고 스스로 경계할 이는 많지 않다.

아이들과 외식하며 행복했다

자기 일처럼 여기는 ‘공감’이라는 매개 없이 딱하고 가여운 마음만 갖고 있으면 ‘값싼 동정’이 돼버린다. 값싼 동정에 그래도 동정하는 마음이 낫지 않냐며 고마워할 이는 많지 않다. 그런 동정을 받으면 그나마 간신히 붙들고 있던 삶의 의욕마저 꺾이기 때문이다. 마음 중심이 흔들려버리기 때문이다.

이날 내가 부모님에게 받고 싶던 건 동정이 아닌 공감이었다. 가족이니까, 내 엄마 아빠니까 나와 내 가족의 삶을 더 이해하고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가족이라도 함께 살지 않는 한 자신과 다른 삶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인 터. 다만 동정을 받았기에 나는 감정이 빵 터져버렸다. 20여 년 전 이혼과 실직을 차례로 겪은 뒤 동정하는 후배들을 앞에 두고 그럴 거면 차라리 돈을 주라고 소리쳤던 선배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이날 일은 잘 마무리됐다. 내가 왜 서러운 마음이 들었는지를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얘기했고, 엄마 아빠는 이런 내 마음을 받아줬다. 내 마음이 사르르 풀린 건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 시작한 부모님의 공감 덕이었을까. 위로금 덕이었을까, 지질한 내가 위로금으로 아이들과 외식하며 행복해했다는 건 부모님에게 비밀이다. 쉿.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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