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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뉴스-제주] 제주 4·3 70년 고통, 무죄로 풀리진 않겠지만...

제주4·3 ‘수형 행불인’ 첫 무죄… 아직 330여 명 재심 개시 기다려
등록 2021-02-06 17:31 수정 2021-02-10 09:41
제주4·3 수형 행불인 유가족이 2021년 1월21일 제주지방법원의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 선고가 내려진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허호준 기자

제주4·3 수형 행불인 유가족이 2021년 1월21일 제주지방법원의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 선고가 내려진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허호준 기자

2020년 한가위에 이어 이번 설에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라는 국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직계가족이더라도 거주지가 다르면 꼭 4명까지만 모여야 합니다. 코로나19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온 직후여서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2020년 설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으로 보입니다. 입춘이 지났어도 아직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고향 부모님 뵈러 가는 길은 조심스럽고, 자식들 얼굴 보러 움직이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이젠 ‘민족 대이동’이란 말도 농경사회 유물로 남을 판입니다.
그래서 <한겨레21>이 ‘우동뉴스’(우리동네뉴스)를 준비했습니다. 명절에도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겨레> 전국부 소속 기자 14명이 우리 동네의 따끈한 소식을 친절하고 맛깔스럽게 들려줍니다. 고향 소식에 목마른 독자에게 ‘꽃소식’이 되길 바랍니다._편집자 주

“20대에 4·3을 만나 혼자 삼남매를 키우멍 너무도 어렵게 살아수다. 아빠(남편) 생각이랑 마랑, 너무 어려워부난 어디사 가신지 생각도 못해수다. 이젠 나이가 하고허난, 이제사 어디사 가신지 너무 생각나고, 볼 수도 엇고, 너무 을큰하고, 말 곧도 못허쿠다.”

(20대에 4·3을 만나 혼자 삼남매를 키우면서 너무 어렵게 살았어요. 남편 생각은커녕 너무 어려워서 어디에 갔는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제야 어디 갔는지 너무 생각나는데 볼 수도 없고, 너무 억울하고, 말을 하지도 못하겠어요.)

제주4·3 당시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남편을 대신해 재심 청구소송을 낸 101살의 현경아 할머니는 1월21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 할머니는 ‘4·3 수형 행불인’의 배우자입니다. 현 할머니는 1948년 가을 남편(오형률)과 함께 밭에서 일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남편이 끌려가 영원한 이별이 됐습니다. 현 할머니 표현대로 ‘너무 을큰한 세월’이 70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농사짓다가, 밥 먹다가…

‘수형 행불인’이 뭐냐고요? 제주4·3이 한창 벌어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제주도에서 군사재판이 열렸습니다. 1999년 국가기록원에서 발굴한 ‘수형인 명부’를 보면, 4·3 당시 군사재판에 넘겨진 도민은 최소 2530명에 이릅니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된 이는 280여 명이고, 나머지는 1년~무기징역형을 받고 다른 지방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상당수가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습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는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제32·33조 위반(적에 대한 구원통신 연락 및 간첩죄)입니다. 이들을 ‘4·3 수형 행불인’이라고 합니다.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산속으로 피신한 많은 도민이 귀순했지만 상당수는 고문받고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집에서 식사하다가, 노력 봉사에 동원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례도 있습니다.

유가족들은 70여 년 동안 시간의 고문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광기의 시대’를 견뎌낸 그들이 나섰습니다. 2021년 1월21일 무죄판결이 내려진 분은 현 할머니를 포함해 10명입니다. 이분들은 2019년 6월 소송을 제기했고, 2020년 2월 소송을 낸 330여 명은 심문 절차를 끝내 재심 개시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법사상 청구인이 이처럼 대규모로 재심 청구소송을 한 사례는 없습니다. 2020년 6월8일 첫 심리를 시작으로 하반기 매주 월요일 4·3 수형 행불인 재심 청구소송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은 광기의 시대를 고발하는 무대이자 눈물과 한으로 살아온 이들의 ‘해원’ 무대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재판장(장찬수 부장판사)이 직접 증언대까지 가서 질문했겠습니까.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 한겨레 허호준 기자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 한겨레 허호준 기자

“남동생은 죽은 엄마 젖 빨아” 눈물의 법정

당시 10살이던 강석붕(83)씨의 아버지는 수형 생활 중 행방불명됐고 할머니는 길거리에서, 갓난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는 경찰지서에 끌려간 뒤 함께 학살됐습니다. 18살 누나는 마을에서 친구들과 놀다 끌려가 희생돼 집안이 초토화됐습니다. 강씨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폭도 새끼’라고 하는 말을 듣고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다. 너무나 억울하다”며 울먹였습니다.

1948년 말 부모를 잃고 이듬해 봄 오빠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는 손민규(88)씨는 “함덕지서에 잡혀 있던 오빠가 20여 명과 함께 줄에 묶여서 제주시내 주정공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직접 봤다. ‘오빠’ 하고 부르자 오빠는 울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일이 가슴에 못이 박혀 살았다”고 했습니다.

부친이 행방불명된 강방자(79)씨는 “8개월 된 남동생을 업고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던 어머니는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남동생이 죽은 엄마의 젖을 빨아 먹었다”고 했습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라”는 재판장의 말에 강씨는 “할 말은 많지만 가방끈 짧은 할망이 무슨 말을 하겠나. 하나 남은 딸자식으로서 나중에 저승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더러운 불명예를 씻고 왔다고 하고 싶다”며 재판부에 명예회복을 호소했습니다.

임춘화(76)씨는 증언석에서 일어서서 왔다 갔다 하며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는 이북 출신 경찰관을 따라 육지로 나간 뒤 임씨는 “고생고생하며 자랐다.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세상에 있느냐”고 했습니다. 임씨는 방청석을 향해 “감자떡 비누(감자나 고구마가 불에 탄 것처럼 거멓게 생긴 비누)라고 들어봤나. 고구마로 알고 (배가 고파서) 그 감자떡 비누를 먹었다. 하늘만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해 방청객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임씨는 재판장을 향해 두 손 모아 빌면서 “4·3 이야기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오늘 이야기하니 너무 시원하다.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국가에 대한 분노보다는 한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는 절절함이 더 보였습니다. 이들의 재심 청구소송을 담당하는 문성윤 변호사는 “행불인들이 사망 여부와 실제 이름과 다른 경우 동일성 여부가 쟁점이 됐는데 재판부가 이를 인정하고 재심을 받아들였고, 이에 기초해서 처음으로 수형 행불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는 데 법률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심 개시 결정을 기다리는 330여 명도 비슷한 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4·3특별법 개정안 이번엔 통과될까

이번 재심 청구소송이 받아들여져 모두 무죄가 된다면 또 다른 수형 행불인 유가족의 소송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4·3 유족이 줄기차게 요구한 군사재판 무효화와 희생자 배보상 문제 등의 내용이 담긴 제주4·3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2020년 연말 처리될 듯하던 4·3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무산됐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회와 도내 주요 거리에서 손팻말을 들고 4·3특별법의 통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2월 국회를 기다려봅니다.

제주=허호준 <한겨레>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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