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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연의 더불어, 장애

장애인끼리 모여 사는 행복한 나라 따윈 없다

장애인끼리 모여 사는 행복한 나라 따윈 없는데, 물리적 통합만 있을 뿐인 한국의 통합교육

제1347호
등록 : 2021-01-16 20:30 수정 : 2021-01-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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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환이가 일반학교 다니던 시절 통합교육을 받았을 때. 혼자 노는 모습이 안쓰러워 복도에서 몰래 사진을 찍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돼본 적 있는가? 난 있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껏 멋 부린 이십 대가 되어 여드름 범벅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낸 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반갑다, 얘들아.” 초반의 왁자지껄한 인사가 끝나고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는데 대화 주제가 미국이다. 마침 그날 모인 친구들의 많은 수가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유학 중이었는데 그 세계도 좁아서 한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됐던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이름들이 거론되는데 대화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게다가 캘리포니아 남부 오렌지카운티의 어느 사거리 모퉁이 가게에서 파는 브런치가 맛있다며 정보를 교환하는데 내가 종로의 생선구이집도 맛있다며 분위기 깰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눈앞의 맥주만 홀짝이다 집에 왔는데 그날의 여파는 컸다. 나만 뒤처지는 듯한 자괴감이 엄습하며 자기효능감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도 즐겁지만 그건 내가 나이를 먹으며 ‘미국’이나 ‘유학’ 등이 삶의 중요한 가치가 아님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래문화에 속해 있을 땐 그것을 벗어난 시각을 갖는 게 쉽지 않은 법이다.

좋은 통합교육 사례 소개해주세요
상황이 다를 뿐 비슷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 나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어버린 어떤 상황.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워~ 워~” 사양하고 싶지만 그런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그 순간 느꼈던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면 너무 빨리 떨쳐내려 애쓰진 말아주길 바란다. 왜냐면 모두가 아는 그 기분, 그 감정을 어쩌면 통합교육 중인 장애 학생은 매일 매 순간 느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애써서 역지사지해보지 않으면 영영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통합교육이 잘 이뤄지는 사례 좀 소개해주세요. 저희도 참고하겠습니다.”

전남 지역 교사들과 화상 채팅 플랫폼 줌으로 소통 중이었는데 한 교사가 불쑥 던진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고 나는 그런 사례를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는데 2년 전 지방의 어느 초등학교 사례를 기사로 읽은 것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제가 아는 선에선 어… 없어요.”

교사들이 놀란다. 교사들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어쩜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일반 초중고 안에서 특수교육을 잘 받는 사례는 많았다. 학생 개인에 맞춘 개별화 교육이 착착 진행되며 교사와 부모의 만족도가 높은 사례는 주변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통합교육까지 잘 받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특수학급에 있는 동안엔 교육다운 교육을 받았지만, 원반에 있을 때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야 하는 건 오로지 당사자 몫이었고. “대한민국 통합교육은 ‘내용의 통합’이 아닌 ‘물리적 통합’일 뿐이다”라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모든 교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교실에서 통합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이 주제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모든 걸 특수교사와 원반 담임 개인 몫으로 떠넘겨 해결될 문제는 아니며,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교실에 같이 있는 것으로 통합교육을 한 셈 치는 ‘무늬만 통합’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어려운 과제, ‘학생이 학교에 간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이제 분위기는 특수학교 쪽으로 기운다. 특수교육 대상자가 상급학교, 즉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특수학교로 전학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돼버렸다. 특수학교 정원이 정해져 있다보니 “추첨에 붙었다”고 하면 “부럽다”며 주변의 축하를 받는다. 그래서 정원 여유가 있는 초등학교 중간에 특수학교로 전학을 가든가, 아예 1학년부터 특수학교로 입학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내 집 앞 가까운 학교를 놔두고 먼 거리 특수학교로 원정을 떠나야 하는 학생들. 왜 누군가에겐 “학생이 학교에 간다”는 단순한 명제조차 고려하고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돼야만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데 왜 그것이 학교생활에서 장애물로 작용하는지, 왜 이 사회는 그 장애물을 뻥~ 하고 걷어차 버리려 하지 않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장애인끼리 모여 사는 행복한 나라” 따윈 없다.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모여 사는 행복한 나라나, 키 큰 사람끼리 모여 사는 행복한 나라는 없듯 말이다. 내 아들도 특수학교에 다니고(특수교사가 세 차례 걸쳐 일반학교에서 특수학교로 전학하라고 권고했다) 학교생활에 만족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들이 살아나갈 세상은 장애와 비장애가 어우러져 사는 이 세상 한복판이다.

유일한 40대 신분으로 20~30대 청년들과 독서 모임을 한 적 있다. 당시 청년들이 “공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요즘 세대에겐 ‘공감’도 배워야 하는 성질의 것인가보구나. 학창 시절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게 아닌. 기꺼이 실천적 행동을 하는 청년들이 기특하면서도 무한경쟁만이 절대적 가치가 돼버린 교육 현실에 한숨이 났다. 이런 시스템 속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피하기 위해 특수학교로의 전학을 결심한 장애아 엄마들의 얘기를 들으며 한숨은 더 깊어지고 있다.

우리가 꾸는 꿈은 같은 꿈일까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 뒤 “우리가 바꿀게”라는 구호가 봇물을 이뤘다. 모두가 바꾸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고, 타인에게 공감할 줄 알며, 서로에게 울타리가 돼줄 수 있는 사회로의 변화를 모두가 꿈꾸는 것일까? 우리가 꾸는 꿈은 같은 꿈일까?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바꾸려는 이 사회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지.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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