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 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5살부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성교육을 실시해주세요.”
2018년 8월 대한민국 아동총회에 참가한 전국 만 10~17살 아동 대표 90여 명이 채택한 정책 결의문 중 하나다. 이들은 “미투 운동에서 알 수 있듯 성범죄가 만연하지만 기성세대뿐 아니라 아동·청소년에게 시행되는 성교육이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며 “성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호기심 충족과 학습을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의존해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 쉽다”고 결의문 채택 이유를 설명했다. 아동총회는 2004년부터 해마다 보건복지부 주최로 열린다.
성교육 요구에 대해 교육부는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2015년 2월) 적용을 통한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성교육 운영”이라는 답변(2019년 6월 말 추진 현황)을 내놓았다. 그러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처음 공개될 때,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을 강조하고, 자위·성소수자 등 기존 보건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조차 빠뜨리는 등 국제기구가 권고한 성교육 내용을 담지 못한다며 일선 학교 교사와 여성·청소년 단체 등에서 철회 요구를 받았다. 2018년 교육부는 학교 성교육 표준안과 관련해 성폭력 피해 대응 위주가 아닌 피해자 인권 보장, 민주시민 교육 관점을 반영한 개편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2020년 11월 현재까지 새 방향의 성교육은 제시되지 않았다.
교육부는 성교육을 내실화하겠다며 2013년부터 모든 초·중·고 학교에서 학년별로 15시간 이상 성교육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했다. 2020년 교육부의 학생건강 증진 정책 방향을 보면,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따라 관련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체계적인 성교육을 하라고 돼 있다. 그러나 성과 관련된 글을 읽고 내용을 요약하는 형식적인 수업도 성교육으로 포함한다는 것이 현장 교사들의 설명이다. 2009년부터 도입한 보건교육 과정에도 성교육이 포함됐으나, 연간 17시간(초등 5·6학년, 중·고교 1개 학년 대상) 가운데 성 관련 내용은 4~5시간에 그친다. 이러한 교육마저 실시하지 않는 중·고등학교도 많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학교 성교육에 대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차별·구시대적 내용이 많다’는 비판은 최근까지 거듭된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가 2020년 9월21일~10월1일 초등학생 142명, 중·고등학생 76명, 성인 395명을 조사한 결과 초등학생 8.6%, 중·고등학생 41.6%, 성인 70.1%가 ‘학교 성교육이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중학생 4065명을 조사한 결과(‘청소년 성교육 수요조사 연구’), 성 지식과 정보를 얻는 주요 통로는 학교 성교육(48.9%)이었으나 유튜브 등 인터넷(22.5%), 친구(17.1%)를 통한다는 답도 적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성 지식을 얻었다는 답변은 2.3%에 그쳤다.
중학생 응답자의 절반(49.2%)은 연애를 한 적이 있고 그중 67.1%는 스킨십(신체 접촉) 경험이 있었다. 또 44.5%는 최근 일주일간 친구들과 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성에 대해 궁금한 점(55.1%), 음담패설이나 의미 없이 성적인 말 하기(51.9%), 야한 글·영상·사이트 등 정보 공유(35.3%)에 대한 대화였다. 무엇보다 성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혼자 알아보고(35.2%), 친구와 상의(30.8%)하는 등 학교, 부모, 정부나 지역사회 기관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 교실 안팎으로 팽창한 성적 호기심을 정작 학교가 받아안지 못하는 셈이다.
‘아웃박스’ 소속 황고운 초등학교 교사는 “학생들은 유튜브를 비롯해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성 정보를 접하고 눈을 더 반짝거리며 호기심을 표출하지만 교사들은 이런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 준비가 돼 있지 않고, 혹여 사회적 논란이 될까봐 함께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안 변화가 더딘 한편, 학교 밖에선 종교·학부모 등 보수 성향 단체가 성교육에 대한 민원과 항의를 이어가고 있다. 2018~2019년 생명인권학부모연합 등은 노골적인 성기·성관계 그림을 넣어 ‘성 문란’을 가르치고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교과서 수정·삭제 운동을 했다.
문제의 교과서 중 하나로 거론된 초등 5·6학년 <생활 속의 보건>(와이비엠 발행) 속 일부 그림은 2020년 들어 수정되거나 삭제됐다. 보건교사들이 참여하는 (사)보건교육포럼이 집필한 교과서로 학교에 보건 교과가 정식 도입된 2009년부터 교육 현장에서 활용한 내용이었다.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20년간 일한 한혜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 보건위원장은 “교육청의 까다로운 심의를 거쳐 만들어진 교과서지만, 정작 민원이 제기되자 교육 당국이 아무런 방어도 해주지 않았다”며 “(거센 민원에) 교사도 당황하고 출판사도 시달려 결국 교과서 일부 내용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2020년 8월25일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날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은 여성가족부 선정 ‘나다움 어린이책’ 일부에 대해 “동성애를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아 많은 우려가 있다”며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책엔 초등학생 조기성애화 우려까지 있는 내용이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돼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여가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학습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도록 돕는 책 134종을 추천도서로 선정하고 2020년 학교 10곳에 보급했다. 그러나 김병욱 의원의 지적이 나온 직후 별다른 의견 수렴조차 없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 7종을 학교에서 회수했다.
한혜진 교사는 “성교육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에게 ‘아이들이 실제 어떤 고민을 하는지 들어봤느냐’고 물어보고 싶다”며 “성교육이 성관계 연령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성관계 연령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국제적으로 검증이 끝난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되도록 성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보호’라고 여기는 인식이 되레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는 지적이다.
‘스쿨 미투’를 계기로 결성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나윤(18) 활동가는 여성 청소년이 무성적인 존재이길 바라면서도 걸그룹처럼 어린 여성의 몸을 소비하는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구조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부채질했다고 본다. 청소년이 자신의 욕구를 함부로 말하거나 분출할 수 없다보니 ‘일탈계’(자신의 몸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올리는 계정)를 했을 가능성이 있고, 이 활동을 외부에 알리겠다는 가해자들의 ‘협박’이 먹혔으며, 심각한 성착취 피해를 봄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분석이다.
학교 성교육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를 정책에 어떻게 반영하면 좋겠냐고 묻자 나윤 활동가는 이렇게 답했다. “성교육을 받는 당사자들을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시키면 좋겠다. 위티 활동을 하면서 여러 부처 자문을 했지만 ‘청소년 의견을 들었다’ 정도에만 그치더라.”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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