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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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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경북 사과는 다 옛말?

사과나무 베고 체리 심은 청송의 김태현 농부,
겨울은 따뜻하고 봄은 냉해가 오면서 체리로 바꿔 심어
등록 2020-08-30 09:01 수정 2020-09-01 02:01

폭우, 산사태, 폭염, 냉해, 고수온…. 정신없이 몰아쳤던 ‘2020년의 기후위기’를 차분히 기록하려 <한겨레21>이 전국의 피해 현장을 찾았습니다. 청소년기후행동의 10대 활동가들이 동행했습니다. 기후재난이 삶을 관통할 당사자이자, 기후재난의 심각성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입니다.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이수아 활동가) 기후위기에 관심 갖게 됐다는 이들은 산과 바다, 마을과 농장에서 기후위기의 위력을 목격하고는 “미래를 살아갈 두려움”(박선영 활동가)이 더 커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관찰에 기자들의 취재가 더해진 ‘2020 기후위기 목격’ 보고서는 문재인 정부와 우리 모두가 읽어봐야 할 기후위기에 관한 최소의 기록입니다_편집자주

“농사짓는 사람들이 기댈 곳이 점점 더 없어지잖아요. 하늘마저도 이러니….”

8월21일 경북 청송군 부남면, 사과나무가 자취를 감춘 너른 대지에는 내 키만 한 체리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었습니다. 다른 농민들이 심어놓은 사과나무에 빙 둘러싸인 그곳은 마치 섬 같았습니다. 베테랑 농부 김태현(55)씨는 2019년까지 이곳에서 30년째 사과농사를 지었습니다. 3300여 평(약 1만1천㎡)에 심긴 사과나무 1160그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이자, 아들딸 건실하게 길러내게 한 살림 밑천이었다고 합니다. 자리를 옮겨 새로 심은 지 9년밖에 안 된, 인간으로 치면 청년기를 막 벗어난 전성기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관리가 안 돼도 15년은 갈 나무였습니다. 그런 사과나무를 2019년 11월 마지막 부사(사과 품종)를 수확한 뒤 베어냈습니다. 그리고 체리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미련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후에선 더는 사과농사를 지을 수 없겠다고, 3년여 고민한 끝에 결론 내렸기 때문입니다.

수정은 어렵고 꼭지는 짧고 표면은 거칠거칠하고

“겨울이 춥지 않아요. 눈도 안 오고요. 있는 사람들은 살기 좋을지 모르겠는데, 농사짓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에요. 겨울에 1차로 병해충을 박멸해야 하는데, 몇 년 사이 그 고리가 깨졌어요. 그러다 꽃 피고 수정될 시기에는 기온이 확 떨어져서 냉해를 입어요.”

2019년 한 그루에 사과 185~200개가 열려야 하는데 평균 33개밖에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해율이 83%였습니다. 바로 냉해 때문입니다. 2017년까지만 해도 4월에 영하 날씨는 상상하기 어려웠는데요. 2018년 4월 영하를 기록한 게 2일(최저 영하 1.7도)이 되더니, 2019년 4월엔 7일(최저 영하 6.1도)로 늘었습니다(청송군청 제공). 개화기에 기온이 떨어지거나 서리가 생기면 꽃의 암술과 수술에 기형이 생겨 수정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운 좋게 수정됐다 해도 사과 꼭지가 짧아 과실이 나무에 매달리지 못하고 가지에서 밀려나 떨어지거나, 녹슨 것처럼 사과 표면이 거칠거칠한 동록이 생기는 등 제값을 받을 수 없는 사과가 속출한다고 해요. 사과 한 상자 가격이 절반까지 뚝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체리는 기후와 크게 상관없어요. 농사가 6월이면 끝나요. 그런데 기후가 아열대로 바뀌어서 6월부터 우기로 접어들면 체리나무 저것도 다 캐내야 해요. 체리는 물을 많이 먹으면 당도가 떨어지거든요. 농사는 24절기마다 언제는 이것 심고 언제는 저것 하는 게 있어요. 지금은 그런 게 점차 의미가 없어지고 있어요.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8월21일 경북 청송군 부남면에서 체리농사를 하는 김태현씨가 자신의 농장에서 약 2㎞ 떨어진 심상국씨 사과농장에서 냉해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8월21일 경북 청송군 부남면에서 체리농사를 하는 김태현씨가 자신의 농장에서 약 2㎞ 떨어진 심상국씨 사과농장에서 냉해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청송 사과 재배 면적의 94%에서 냉해 피해

청송 지역 대부분 농가는 여전히 사과농사를 짓습니다.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를 감내하면서요. 김태현씨 농가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심상국(42)씨는 체리농사를 짓기로 한 형님 김태현씨 선택을 묵묵히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사과 대신 다른 농작물을 심을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런데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몇십 년간 쌓아온 기술과 경험을 모두 버리고 새로 농사를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아요.”

심상국씨 과수원에 달린 홍로(사과 품종)는 붉은색으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과에 누렇고 우둘투둘한 무늬가 번졌습니다. 동록입니다. 그 옆의 사과는 꼭지가 너무 짧아서 가지에 찰싹 붙어 있더라고요. 2천여 평에서 30% 면적이 냉해로 이런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부모님 고향인 청송에서 2005년부터 사과농사를 지어왔다는 그는 이렇게 꼭지가 짧은 사과를 본 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홍로가 부사보다 꽃이 더 크거든요. 되게 복스럽게 보이는 꽃인데, 올해는 꽃과 꽃대가 작아서 꽃따기하려고 해도 어떤 게 살아남을지 모르니까 손을 못 대겠더라고요. 사람이 추위에 움츠리듯, 꽃대가 짧아지니 꼭지도 짧아지는 거죠.”

올해 청송의 3312㏊에서 저온 피해를 보았는데, 그중 사과 재배 면적이 3166㏊라고 해요. 청송 지역 사과 재배 면적(3339㏊·2018년 기준)의 94%입니다. 지난해에도 힘들었습니다. 서리(5월), 우박(6월)에 이어 17호 태풍 ‘타파’와 18호 태풍 ‘미탁’이 닥쳤기 때문입니다. 농민은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어요.

통계청은 2018년 강원도 산간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 지역이 21세기 후반기에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주요 농작물 재배 가능지는 북상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사과, 복숭아, 포도, 인삼 등은 재배 가능지가 점차 줄어들 거라고 해요. 특히 사과는 주산지인 대구와 주변 지역(경산·영천·경주 등)의 재배 면적이 감소하면서 충북(충주·제천)과 충남(예산 등)에 재배 면적이 집중됐고, 강원도(정선·영월·양구) 산간 지역까지 확산했다고 하네요. 결국 재배 적지가 급감해 21세기 말이 되면 강원도 일부에서만 재배가 가능하다고 전망했어요. 올해 우리나라 사과 재배 면적(3만1601㏊)은 전년(3만2954㏊)보다 4.1% 줄었다고 합니다.

선택의 기회조차 없는 우리들

경남 김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이번 장마 때문에 농산물 가격이 폭등했다고 하셨습니다. 얼갈이배추 가격은 2배, 상추는 1.6배 뛰었다고요. 과거 부모님이 걱정하니 오른 가격에 대해 불평만 했지, 농산물 가격을 오르게 한 기후위기까지 생각이 닿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사과농장에서 체리농장으로 바꾸는 게 농민의 선택에 달렸지만, 기후위기가 더 심각해진다면 이는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닐 겁니다. 기후위기로 불가피한 선택에 내몰리는 사람이 농민뿐만은 아닐 거고요.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설 기회조차 없이, 암담한 미래를 맞고 싶지는 않습니다. 2020년 3월 정부에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에 참여한 원고 19명 중 한 명이 된 이유도 그래서였어요. 나와 친구들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소극적으로 규정한 현행법(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과 시행령 제25조 1항 등)이 청소년의 생명권과 환경권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냈어요. ‘사상 최고 폭염이다’ ‘사상 최장의 장마다’ 하는 말이 뉴스에서 반복되는 걸 보면서 기후위기를 체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미래 세대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기후위기로 우리 생존을 위협받는다면, 그때 우리는 누굴 원망해야 하나요?

청송=구민주(19)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

취재 도움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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