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지막한 종이에 거북이를 닮은 섬 테두리가 그려져 있다. 40대부터 70대까지 전남 강진 가우도 주민 네 명, 거북이(그림)를 노려본다. 색연필을 쥐고서. 섬 홍보에 쓸 지도를 만든다고 했다. 테두리 안에 채울 자랑거리를 궁리한다. 거북이 등딱지 가운데 청자타워, 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바다해길, 섬과 뭍을 연결하는 출렁다리, 가우도 주민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섬 카페 가우나루, 그 뒤로 짓고 있는 모노레일은 이미 표시해뒀다. 그리고 또….
‘주민·삶·역사’ 열쇳말로 2015년 시작
“여그서, 정약용 선생이 찾아온 아들을 딱 안는 거다, 이 말이재.” 보라색 폴로셔츠, 목깃을 세운 꽤 세련된 차림의 주민 김영일(62·이하 존칭 생략)이 거북이 목 왼쪽 부위에 검은색을 칠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 부자 상봉 장소’라고 적는다. 실제 이 자리에서 정약용 부자가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상봉하는 두 사람을 (자못 추상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 놓였고, 강진 하면 정약용과 다산초당인데다, 선생은 <경세유표>에서 ‘진실로 경영(가꾸기)을 잘한 섬’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했으니… 무리 없다. 자신 없는 눈치로, 이장 김성현(46)은 한때 가우도 특산품이던 황가오리를 지도 여백에 그려본다. “이렇게 그리면 된당가?” 주황색으로 덧칠한다. 지금은 가우도에서 황가오리를 잡지 않는다. 섬에 어업 하는 가구는 두 가구 남았는데 그들마저 나이 들어 쉬엄쉬엄한다. 대신 쌀가루로 만들어 조금 퍽퍽하고 심심한 맛인 황가오리빵이 마을 특산물이다. 그리고 또… “더 있는디. 이게 어따 딱 붙여놓고 소주 한잔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적어야 한다”고 누군가 제안했고 모두가 동의했다. 소주를 꺼낸다. 독특하게 녹차를 섞어 마신다. 지도는 금세 잊힌다.
2020년 7월28일(그리고 2015년 1월)
2박3일 가우도에 머물기로 했다. 성공한 관광지가 된 섬과 주민을 관찰한다는 명분이지만 반은 여행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휴가철 아닌가. 2015년 강진만에 떠 있는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인 가우도는 전남도 ‘가고 싶은 섬’ 첫해 사업지로 선정됐다. 5년 동안 40억원 들여 섬을 꾸몄고, 이제 남은 사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14가구 30명 안팎이 산다. 주민 주도형 섬 개발 성공 사례로 자주 소개된다. 가우도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고금도와 완도 땅 그 사이 점점이 박힌 다른 섬의 모습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거북이 안에 그려넣은 대부분 것들이 시작된 2015년 1월부터 지금까지의 일들, 둘러앉아 되짚어보기로 한다. “정신없었재. 우리 스스로 이룬 게 뭣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이장 김성현의 말, 당황한다. “모범 사례라고 들었다”고 얘기해봐도, “주민 내쫓거나 소송 벌인다는 딴 섬들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지마는…” 정도다. 김성현은 2013년 도시 생활을 접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가우도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빨랐지만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 곳”이라고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어려운 귀향은 아니었다. 마을 막내라 맡은 일이 많을 뿐이다. 이장 겸 주민협동조합 대표자 겸 가우나루 운영자 겸 마을회 총무 겸….
주민들, 까끔·갯것 놓고 관광객을 맞다
가우도 가고 싶은 섬 개발은 ‘주민, 장기적, 식생, 삶, 역사’ 같은 것을 강조했다(이낙연 전 전남도지사가 가고 싶은 섬 사업을 발표하며 쓴 단어들이다). 2010년대부터 변화한 농어촌 지역 관광 개발 태도가 반영됐다. 학계나 시민단체들이 주장한 ‘커뮤니티 관광 개발’ 개념이 들어왔다. “지역주민들이 자신의 자원을 동원하여 개발에 참여하고, 그들 자신의 요구들을 정의하며 그것들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의사결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송영민, ‘커뮤니티 기반 관광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찰’) 주민, 주민이 반복된다. 2015년 가우도 주민들은 가고 싶은 섬 사업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그래도 관광지 개발 주역으로 보여야 했다. “급한 대로 남들 쓰는 정관을 고대로 가져와서 주민협동조합 만들고, 관청에서 만들어온 사업에 서명하고 사진 찍히면서 정신없이 협조했응게.”(이장 김성현)
사업 초기 정신은 없어도 들뜬 분위기였다. 사람이 몰렸다. 2017년 한 해 가우도 찾은 관광객만 90만 명 가까웠다. “강진 와서 가우도 오는 게 아니라, 가우도 보러 강진 온 셈”(70대 주민 김창현)이라는 자부심도 생겼다. 삶은 변했다. 집성촌이라 경주 김씨이거나 경주 김씨의 가족인 섬 주민들, 어부이자 농부였던 사람들은 강진군 대표 관광지 주민이 됐다. 까끔(동산을 다들 이렇게 부른다)에 있던 밭을 버리고, 갯것(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에서 나는 것들) 캐던 호미를 놓고, 배를 팔고, 대신 관광객을 맞았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강진만으로 흐르는 탐진강 상류에 댐이 생겨 민물이 줄고 섬에 다리가 놓여 조류가 바뀐 참이다. 어족 자원이 줄었고 바닷일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 섬에 예산이 쓰였고, 관광지가 됐고, 새로 살길을 찾았다.
“그러다 금세 싫증이 나부렀재.”(김창현) 들뜬 마음이 가쁜 현실에 식어갔다. 당장 30명 사는 섬에 수십만 명이 몰리자, 쓰레기나 하수 처리 문제가 생겼다. 바다로 흐르는 하수 탓에 갯지렁이가 사라져 한동안 갯벌이 오염될까 난리였다. 가우도의 풍족하고 맑은 물도 바닥났다. 결국 상수도 공사를 하고 뭍의 물을 끌어쓰는 처지가 됐다. 개발이 벌어지는 속도가 모두에게 너무 빨랐다. 주민들은 일어난 문제를 제기하느라 바빴고, 군에서는 그 와중에 관광객을 모을 만한 시설물을 설치해야 했다. 예산은 나왔으므로. 일할 만한 젊은 사람(대략 70대 초반 이하)이라봐야 10명 안팎인 섬 주민은, 그 속도에 자꾸만 뒤처졌다.
여전한 관 주도 속 관광객 2년 새 30만 명 감소
주민 모르는 새 관청에서 사업하고 뒤늦게 아는 일이 많았다. “홈페이지(예산 1천만원)를 만들었다는데 이게 우리가 관리할 수도 없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겄어.” “모노레일 공사(예산 40억원)를 하는 건 알았는데 저러코롬 짧게 짓는다는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재.” “민간회사가 운영하는 집라인 수익을 주민 협동조합에도 쫌씩은 나눠주는 줄 알았는디, 전혀 아녀.”
그러다 관광객이 줄었다. 2019년 관광객 수는 56만 명에 그친다. 2017년과 비교하면 60% 정도다. “올 사람 다 오고 이제는 섬의 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닐지” 주민들은 초조하다. 가우나루 뒤편 청자타워로 향하는 모노레일도 놓이고, 거북이 머리와 등껍질 사이에 새 출렁다리도 놓고 있지만, 마음 놓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반짝 인기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광자원이 될지 모르겠으니께. 우리도 가고 싶은 섬으로 5년 지내면서 깨달았재. 우리 스스로 가우도에 맞는 게 뭘지, 좀 길게 갈 수 있는 관광자원이 뭔지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의견을 내야 했던 거여.”(이장 김성현)
그런 마음으로 며칠 전 군수와 면담하고 왔단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기색이 아니어서 그게 또 서운했다. 가우도 사람 특유의 품위(“경주 김씨가 양반이라 점잖애”는 가우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를 잃지는 않았다. 김영일이 “군수님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보네요잉” 꼬집어본 정도다. 주민들 그 장면 묘사하며 시원한 표정인데, 초조하고 안타깝고 서운했던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이쯤, 잠깐 멈추고 “가우도를 위하여” 외치며 잔을 부딪친다. 가우도를 위해 주민이 있을 수 있는 자리만은 여전히 모호해 어딘지 씁쓸하다.
자리를 나설 때쯤, 이장 김성현이 “내일 4시까지 가우나루로 모이시라” 주민들에게 공지한다. 가우나루 왼편 모노레일 공사를 위한 선착장을 짓는다며 군청 직원과 건설업자가 찾아오기로 했다. “이번에는 똑똑히 따져봐야겠구마” 주민들은 다짐한다.
2020년 7월29일(그리고 2011년 7월)
“개벽이었재.” 김영일이 섬과 뭍 사이 놓인 다리를 보며 말한다. 2011년 7월 저두출렁다리가 놓였다. 뒤이어 섬 반대편에 망호출렁다리가 놓였다. 이름은 출렁다리라고 붙였지만 출렁이지는 않는다. “섬 안에 진짜 출렁다리를 짓고 있어요. 내년 봄에 오심 보실 수 있당게요.” 해명하는 일은 주로 저두출렁다리 앞에 있는 카페 가우나루를 관리하는 이장 김성현 몫이다. 실은 주민들도 의문이다. “왜 이름을 저라고 짓고 또 출렁다리를 놓는가는 몰라. 볼거리 생기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이장 김성현)
아무튼 출렁이지 않는 출렁다리는 많은 것을 바꿔놨다. 뭍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작은 섬이라 정기적으로 배가 다니기도 모호했다. 원래는 나룻배, 그러다가 개인들이 가진 통통배(모터 달린 어선)가 아니면 섬에 닿을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배가 없어서 이웃집에 부탁하기도 눈치 보였으니께, 저 다리 아니었으면 나도 섬 들어올 생각 못했겠재.” 김영일은 2016년 다리를 믿고 고향인 섬에 돌아왔다. 60대 초반이니 귀한 일꾼이다. 주민 협동조합에서 사무장 역할을 맡는다. 협동조합에는 가우도 14가구 모두 참여한다. 가우도 안에 있는 카페 두 곳, 황가오리빵집, 낚시 공원을 협동조합이 운영한다.
조합 운영 가게와 개인 가게 놓고 갈등도
다리를 타고 사람이 몰리고 수익이 생기자 중요한 질문이 던져졌다. 벌어들인 돈은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돼야 공정한가. 관광객이 정점에 이른 2017년 협동조합 소속 매장의 매출액은 5억여원에 이른다. 인건비 1억8천만원 정도는 일하는 섬 주민들 몫이 됐고, 수익금 7천만원 정도도 14가구가 나눠가졌다. “초반에는 일단 없던 수익이 생겼으니까 큰 고민을 못했재. 할머니들도 엄청 좋아하셨고.” 김영일이 그때 매출액 자료를 펼쳐보며 기억한다.
매출액은 가파르게 빠진다. 2018년 협동조합 가게 매출액은 3억여원 수준, 2019년에는 1억여원 수준이다. 관광객도 줄었지만, 군에서 섬 건너편 다리 입구 주차장에 상점가를 지은 탓도 있다. “다리 건너 딴 동네 사람들도 가우도 덕을 봐야 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바깥이랑 섬 안이랑 업종을 구분해가면서 짜임새 있게 관리도 안 한 건 너무했재. 천편일률적으로 음료나 먹거리를 판 거여. 가우도 안에서는 소비하지 않게 됐재. 다만 천원, 이천원이라도 섬 안에서 쓰일 수는 없을랑가 그런 고민이 생긴 거여.”(김영일)
섬 안에도 미묘한 갈등이 생겼다. 주민들도 협동조합 이외에 각자 식당이나 펜션을 운영했다. 협동조합 소속 가게와 업종이 겹쳐 경쟁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각자 개인 장사에만 골몰하며 마을 가게 일은 뒷전으로 미루는 건 아닌지 서로 의심했고, 뒷말이 오갔다. ‘가우도 가고 싶은 섬 사업’의 상징이던 협동조합 식당은 경쟁과 일손 부족 탓에 카페로 업종을 바꾸었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협동조합 규정을 만들어야 했는데 너무 급하게 해부렀어. 이웃이 같은 회사 직원이 되는 거랑 비슷한데, 이게 얼매나 어려운 일인데.”(이장 김성현) 마을 사람들 마음이 조금씩 멀어진다. 아직 대놓고 갈등이 일지는 않았지만, 지금이 중요한 갈림길이라는 생각은 주민 모두 비슷하다. “그동안은 주민들 간에도 서로 터놓고 얘기를 못했는데, 올해는 싹 한번 정리해야 할 것 같어요.” 이장 김성현이 말했고, 김영일은 고개를 끄덕인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참 얘기하고 있자니 가우나루에 군청 직원과 건설업자가 찾아왔다. 선착장 공사에 동의해달라는 동의서를 들고 왔다. 예상치 못한 동의서를 보고 이장 김성현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내 마음대로 갑자기 동의서에 사인할 수는 없응게. 마을 주민 회의를 할 테니 내일 다시 봅세” 말하곤 돌려보낸다. “주민이 전부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혀. 안 그러면 또 오해 생겨.” 돌아서는 이들을 보며 김성현은 읊조린다. 따져보면 결국 가족인 집성촌, 30명도 안 되는 주민이 오해하고 갈리는 일이 가장 무섭다.
2020년 7월30일(그리고 1982년 9월)
마을 회의 열리기 전, 가우도 마을회관에 노인 셋이 누워 있다. 군에서 전기요금을 다 내주는데도 에어컨은 켜지 않았다. “할 일이 뭐 있당가. 이제 갯것도 못 잡고 요로코롬 누워 있재. 바지락도 안 나.” 64년간 섬에서 살아온 안전순(87)이 멋쩍은 듯 주섬주섬 일어난다. 섬사람들이 간직한 어떤 공통된 기억을 다시 듣는다.
1982년 가우도가 예기치 않게 유명해진 날이 있었다. 전교생 6명인 도암동국민학교 가우도분교 어린이 두 명이 밀물과 썰물을 조사해 과학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강진 읍내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김씨들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술 묵고 꽹과리 치고” 했던 기억, 그래도 당집 제사를 지낼 때면 제 지내는 사람들만은 “꼭 가둬두고 사람 접촉을 못하게 했던” 기억도 안전순은 여느 가우도 사람들처럼 떠올린다.
미래 내다보는 장기 전망 궁리할 때
하나둘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인다. 선착장 얘기를 한다. “바다까지 길게 선착장이 나면 물길을 바꿔 그나마 갯벌을 망칠 수 있다”는 걱정에 웅성댄다. 이번만은 김영일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동의서 받아오라는 제동 걸리지 않았으믄, 주민들한테 또 얘기도 안 하고 군에서 마음대로 공사했을 것 아니여.” 분위기, 회의 전에 이장 김성현이 한 말 그대로다. “어쨌든 섬 생각하는 마음, 잘되고자 하는 마음이야 주민 다들 비슷혀.”
그럴 수밖에 없다. 섬사람들 웃으며 하는 얘기, 한결같이 다 함께 겪은 일들뿐이다. “깨벗고, 옷은 밀짚모자에 넣어가지고 뭍까지 헤엄쳐 가곤 했던”(60대 주민 김채관) 기억, “뱃사공에게 업힌 채 뻘을 건너 섬에 들어왔던”(김창현) 기억, 매일 얘기해도 날마다 우습다. 좋았던 기억이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런 과거, 그랬던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끊어질까봐. “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뭐냐면, 우리 후대가 ‘아니 그때 그 어른들은 대체 뭐했대’ ‘왜 그 좋다던 섬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놨대’ 하는 소리 듣는 것이여. 우리는 인자 이 섬이 관광지로 잘돼야 쓰는 것은 맞아. 개발해야재. 그래도 10년 뒤, 20년 뒤까지 생각하면서 했으면은 좋겠어.” 이장 김성현이 “매일 보는데도 가끔 술 먹고 들어가다 한 번씩 보면 새삼 감탄하곤 하는” 섬 풍경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말한다.
강진=글·사진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